가을의 맑은 물가에서

  • 등록 2024.09.25 11: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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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함께 백로ㆍ해오라기를 볼 수 있는 것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69]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도시에서 복잡한 자동차 행렬과 아파트 숲 사이에서 살다 보니 맑은 물이 흐르고 새가 날아드는 자연환경이 그리운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서울이라는 도심 한가운데에 청계천을 다시 파고 물이 흐르도록 한 효과를 알게 된 이후에 지자체들도 물길이 있으면 주변을 깨끗하게 정비하고 나무와 꽃들이 자라는 터를 다듬어주니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공간이 많아졌다. 청계천에서 지난봄 눈처럼 흰 해오라기를 한 마리만 만난 것도 그 덕택이었을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인 서울 은평에는 북한산 서북쪽 자락에서 구파발 쪽으로 흘러내리는 구파발천이라는 작은 하천이 있는데 거기에 가끔 해오라기나 왜가리가 날아와 눈을 즐겁게 한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파래진 하늘이 개울물에 비치면 거기서 긴 목을 빼들고 조용히 서 있다가 물속에 작은 물고기라도 보면 먹이를 잡아먹곤 하는 모습이 정갈해서, 하천을 따라 바쁘게 걷다가도 발길이 잡혀 한참을 보게 된다. 참으로 멀리 가지 않고도 자연 속 생명의 세계를 느끼게 된다.

 

 

이런 물가에 날아오는 새는 이름이 조금 헷갈린다. 백로과인 것은 틀림없는데, 그게 백로인지, 왜가리인지, 해오라기인지가 헷갈리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가 감로사라는 절에 갔다가 본 풍경을 그린 시를 하나 보면

 

아름다운 누대 추녀 꿩이 날개를 편 듯 / 金碧樓臺似翥翬

푸른 산 맑은 물이 겹겹이 감쌌네 / 靑山環遶水重圍

서리에 해 비치니 가을 이슬 더하였고 / 霜華炤日添秋露

바다 기운 구름을 찌르니 저녁놀 흩어지네 / 海氣干雲散夕霏

기러기는 우연히 문자를 이루면서 날아가고 / 鴻雁偶成文字去

백로는 스스로 화도를 그리면서 나누나 / 鷺鶿自作畫圖飛

실바람도 일지 않아 강물 거울 같으니 / 微風不起江如鏡

행인이 물에 비친 그림자와 함께 가네 / 路上行人對影歸​

 

라고 번역이 되어있는데, 하늘엔 기러기가 날면서 무슨 글자 같은 것을 보여주고, 땅에서는 백로가 물에 있다가 날아 올라가는 것이 멋진 그림(畵圖)이 된다고 찬탄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백로라고 번역한 새의 한자표기가 노자(鷺鶿)다. 백로와 노자는 다른 새로서, 노자는 몸 색깔이 하얗지만, 깃털에 잿빛 색깔이 들어가 있는 왜가리가 아닌가 싶지만,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를 백로라고 번역한다.

 

 

이규보의 다른 시를 보면​

 

앞 여울에 고기와 새우 많으매 / 前灘富魚蝦

해오라기가 물결을 뚫고 들어가려다 / 有意劈波入

사람을 보고 문득 놀라 일어나 / 見人忽驚起

여뀌꽃 언덕에 도로 날아 앉았네 / 蓼岸還飛集

목을 들고 사람 가기 기다리나니 / 翹頸待人歸

보슬비에 온몸의 털 다 젖는구나 / 細雨毛衣濕

그 마음은 오히려 여울 고기에 있는데 / 心猶在灘魚

사람들은 그를 한가하게 서 있다고 이르네 / 人噵忘機立

                                                 ... 이규보/ 여뀌꽃과 흰 해오라기[蓼花白鷺] ​

 

라고 해서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물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려다 사람에 놀라 물가로 가 있으면서 사람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백로를 잘 그려내고 있는데 햔자 이름이 백로인데도 번역은 해오라기로 한다. 여기서도 백로와 해오라기가 혼용되고 있다. 다른 데에서도 번역자에 따라 백로니, 해오라기니 왜가리니 하는 다른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예전에 우리 말을 표기할 글자가 없어 한자로만 기록할 때부터의 폐단이거나, 아니면 그런 새들의 이름을 다 같다고 보는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름이 어떻든 간에 하여간 물가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새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이규보가 인식한 대로, 사람들은 그 새를 보고 한가롭게 서 있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태백)은 '白鷺鶿(백로자) '라는 시에서

 

白鷺下秋水 백로가 가을 물에 날아 내린다

孤飛如墜霜 한 마리 서리같이 사쁜 내리네

心閒且未去 마음이 한가로운가 가지를 않고

獨立沙洲傍 외로히 우두커니 물가에 서있네

 

라고 가을 물가에 우뚝 서 있는 새롤 보고 이백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이 시의 번역애서도 새 이름이 백로, 해오라기, 왜가리 등 왔다 갔다 하지만 새 이름을 어떻게 번역하든 간에 가을 물가에 서 있는 이 새를 보면 확실히 마음이 차분해지고 이제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을 더 하게 된다.

 

 

동양의 지식인이나 문인들은 인간이 무언가를 얻으려는 마음을 욕심이라고 경계하며 욕심을 버리라고 말하고 가을 물가에서 보는 이 새도 욕심이 없는 경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깨끗한 물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물새들을 보면 확실히 부질없이 욕심을 부리며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 중기의 퇴계 이황도 산수가 아름답고 물이 흐르는 곳이 있으면 시간을 내어 홀로 찾아가 구경하면서 시를 읊는 것을 좋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제자 이덕홍이 전하는 데 따르면 제자들과 도산(陶山)에 가서 안개 낀 숲속, 꽃이 만발한 장면을 보고는 두보(杜甫)의 시

 

소용돌이에서 목욕하는 해오라기는 무슨 마음인고,

외나무에 꽃이 피어 절로 분명하구나.

盤渦鷺浴底心性, 獨樹花發自分明.

 

라는 구절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었다. ​

 

제자 덕홍이 묻기를 “이 시는 어떤 뜻입니까?” 하니, 퇴걔는 “자신을 수양하는 군자(君子)는 굳이 의식하고 의도하는 바가 없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제자가 또 묻기를 “해오라기의 목욕은 누구를 위해서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며, 꽃이 피어 절로 밝고 절로 향기로운 것은 본래 누구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까?” 하니, 퇴계는 “이것은 바로 아무런 작위(作爲)를 함이 없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의 한 증거일 뿐이다. 배우는 자는 응당 몸으로 증험하여 그 의리를 바르게 하고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그 도(道)를 밝히고 그 공(功)을 계산하지 않는다면, 꽃과 해오라기와 차이가 없을 것이다. 만약 털끝만치 작게라도 무엇을 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학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간재집》 제6권 계산기선록 하〔溪山記善錄 下〕)​

 

퇴계는 무언가 억지로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앞서면 진정한 성취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해주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새들도 물고기를 잡으려는 욕심이 있다. 다만 그것이 자연의 이치에 따른 순리적인 욕심일 뿐이다. 그렇지만 물가의 이 새들을 보며 그들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욕심 없이 살아가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은 우리들의 삶을 사는 방법으로는 좋지 않은가? 그렇게 해야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어느 시인은 맑은 강물에 반짝이는 햇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퇴계가 제자들에게 전해준 것 같은 무욕의 맑은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고백한다.

 

강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맑은 물 위에 뜬구름이 흘러가고

한동안 어슬렁거리던 왜가리도 날아간다.

내가 앉아있는 동안

멈추어 서 있는 것들이 있었을까?

알게 모르게 바람이 지나가고

나무와 풀들은 서서도 움직인다

내가 앉아 쉬는 동안

머릿속의 생각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듯

오다가 가고 가다가는 온다

제자리걸음만 하는 윤슬에 붙들린 채

                                         .. 이태수/ 윤슬에 붙들리다.

 

가을 입구 도회지 안에서 맑은 물과 함께 백로나 해오라기 등 새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는 좋은 선물이다. 가을은 달이 유난히 밝다고 하는데 맑은 가을의 달을 보며, 차가운 물을 손으로 퍼 올려 얼굴을 씻을 수 있다며 이 가을 우리의 삶의 의미를 다시 설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

 

 

 

 

 

 

이동식 인문탐험가 ld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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