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욕에서 비자금까지, 궁궐 속 일상

  • 등록 2024.10.28 12: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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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 사람들의 숨은 이야기》, 이광렬, 대일출판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궁궐.

임금이 나랏일을 보는 ‘궁(宮)’과 문 쪽에 있었던 망루인 ‘궐(闕)’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구중궁궐’이라 할 만큼 깊었던 이곳에서 무수히 많은 일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인생을 일구었다.

 

이광렬이 쓴 이 책, 《조선시대 궁궐 사람들의 숨은 이야기》는 온갖 희로애락이 넘실댔을 이곳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 쓴 책이다. 온천욕과 비자금 등 다른 역사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내밀한 이야기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임금의 여가생활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온천욕이었다. 특히 세종과 세조, 현종이 온천을 참 좋아했다. 오늘날에도 유명한 ‘온양온천’은 그 명성이 세종 시절부터 자자했다. 세종이 왕후와 왕세자, 문무 군신 50여 명과 수천 명의 호위 병사와 함께 떠날 때면 그 행렬이 대단했다.

 

바다와 가까운 온양은 왜구의 침략이 있을 수 있어 경호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이 온양온천으로 행차할 때는 수많은 기병을 온양 10리밖에 배치해 놓기도 했다. 세종은 온양온천에서 씻은 뒤 눈병이 크게 좋아지자, 이곳을 더욱 즐겨 찾았다.

 

(p.73)

세종은 온천욕으로 눈병에 많은 효과를 보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도승지 조서강 등이 문안을 드리자, 세종이 자신의 병세에 대해 말했습니다.

“내가 두 눈이 흐리고 아파서 봄부터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온천에서 목욕한 후로는 책을 펴놓고 보아도 별 어려움이 없이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이 말은 들은 도승지 조서강 등은 “안심하시고 오래 목욕하시어 영구히 치유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 일이 걱정이 된 세종은 온천욕만 하고 있을 수 없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환궁한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세종은 눈병이 나은 것을 기쁘게 여겨 온수현을 온양군으로 승격시키고, 충청 관찰사에게 옷 한 벌을 하사했다. 세조 또한 즉위한 지 10년이 되었을 무렵 정희왕후와 온양온천을 찾았고, 이듬해에는 혼자서 두 번이나 온천을 찾았다. 재위 14년에는 온양에서 50일이나 머무르며 무관들의 무술 실력을 겨루는 대회를 열기도 했다.

 

현종도 숨겨진 ‘온천 애호가’였다. 눈병과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온양온천에서 한 달 정도 목욕하고 증세가 좋아지자, 기회만 닿으면 온천욕을 하기 위해 애썼다. 물론 궁궐 밖 행차가 그리 쉽지 않았기에 궁여지책으로 서울 부근에 있는 온천수를 대궐로 운반하여 궁궐 안에서 온천욕을 하기도 했다.

 

임금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경비는 국가 재정으로 충당했지만, 임금에게는 기본적으로 ‘비자금’이 있었다. 이 비자금의 시초는 함경도 지방 토지 삼 분의 일을 소유할 만큼 거부였던 태조 이성계의 개인 재산이었다고 한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태조의 개인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킬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이방원이 개인 재산으로 하고, 이를 왕실에서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태조의 재산이 비자금의 원천이 되었다.

 

이 재산은 ‘내수사’라는 관청에서 관리했는데, 그곳의 관리들은 정5품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내시들이 관리했다. 이렇듯 내시를 통해 관리되었기에 양반 관리들은 임금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어떻게 자금이 운용되는지 알 수 없었다.

 

내수사에서는 전국에 있는 임금의 재산을 관리하고 늘려나갔다. 내수사 소속 토지는 세금이 경감되고 소작료가 낮게 책정되었기에 농민들은 내수사 토지를 경작하려고 애를 태웠다. 내수사에 소속된 노비 또한 다른 공노비와 견주어 업무 부담이 가벼워서 내수사에 배속되기를 원하는 노비들이 많았다.

 

내수사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확보한 임금은 자녀들에게 토지나 노비를 하사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신하에게 사적으로 상을 내리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절을 짓거나 거액의 돈을 시주하기도 했는데, 이는 주로 대비가 하는 일이었으나 자금을 주는 쪽은 임금이었다.

 

조선 왕실의 비자금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액수를 가늠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왕실 소유인 땅의 생산성은 1등급이었고, 토지만 따져보아도 총넓이 11,340,120평으로 땅값과 수확량이 굉장히 큰 규모였을 거라는 추측이다.

 

옛날이든 지금이든, 사람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온천욕으로 병을 다스리고, 비자금을 운용하는 모습은 왕실 사람부터 필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 번쯤 해봤을 법한, 꽤 친근한 모습이다.

 

200년 전만 해도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을, ‘궁궐 속 사람들 사는 이야기’가 이렇게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세월의 신기한 마법이다. ‘어떻게 사는지’가 더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행동이 언젠가 후대에 널리 알려질 것을 생각해 조심스럽게 삼가야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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