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예술 50년, 김봉준 작가에게 푹 빠지다

  • 등록 2025.04.22 12: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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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싸목싸목다목적홀서 <민주화운동과 나의 민중미술> 특별강연

[우리문화신문=글 이윤옥, 사진 김영조 기자] 그제(20일) 저녁 4시부터 광주광역시 서구에 있는 까페 싸목싸목 다목적홀에서는 아주 특별한 강연이 있었다. 연사는 김봉준 작가로 ‘민주화운동과 나의 민중미술-창작을 징검다리로 50년을 건너다-’라는 주제의 강연이었다. 저녁 4시 강연에 맞춰 서울에서 KTX를 타고 광주송정리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까페 싸목싸목다목적홀’을 가달라고 하니 택시 운전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주소를 알려달란다. 신참 기사였나보다. 그 유명한 까페 싸목싸목 다목적홀을 모르다니 말이다.

 

이에 앞서 2주 전쯤 광주에서 시민사회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한국사회조사연구소장인 김순흥 교수로부터 김봉준 작가의 강연 홍보물을 카톡으로 받았다. 덧붙이는 말에 “우리나라 민중미술 특히 걸개그림과 판화의 선구자이신 김봉준 선생이 직접 자신이 문예운동 50년을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릴 수 있으니 미리미리 사전 예약을 하셔야합니다.” 라는 말을 듣고 일찌감치 사전 예약과 동시에 KTX를 예매했다.

 

강연 시간은 오후 4시부터 2시간이 잡혀있어 귀경 열차는 넉넉하게 8시 50분 차를 예매하고 강연장을 찾았다. 강연은 4시에 시작되었고 쉬는 시간 별로 없이 4시간이 훌쩍 지났으나 아직도 끝이 안보였다. 하는 수 없이 마무리를 못보고 귀경 열차를 타러 역전으로 뛰었다.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훌쩍 지났다.

 

 

올라오는 열차 안에서 나는 메모장을 넘겨보며, 4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던 김봉준 작가를 떠 올렸다. ‘창작의 시간 50년’, 새로운 장르인 민중미술을 선도해온 작가에게 2시간의 강연 시간을 준 것은 애당초 부족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다목적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 듯 김봉준 작가가 살아낸 시대와 그 거친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작가의 삶에 빠져들어 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인문학을 해온 사람으로 미술의 세계는 잘 모른다. 더구나 ‘민중미술’ 이라든가 미술을 접목시킨 ‘문예운동’ 과 같은 말은 친숙하지 않다. 특히 추상의 세계를 그린 미술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고 흥미도 없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가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도저히 무엇을 나타내는지 모르는 작품들을 구태여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 나의 미술에 대한 평소 ‘소견’을 일시에 바꾸어 놓은 강연이 김봉준 작가의 ‘민주화운동과 나의 민중미술’ 강연이었다.

 

 

 

 

강연 중간중간에 보여준 시대별 특징이 고스란히 배어난 그의 작품들은 한눈에 보아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척 알 수 있어 좋았다. 어디에 방점이 있는지 어린아이라도 금세 알 수있을 것 같았다. 특히 민중들의 다양한 주제를 판화로 나타낸 작품이 주는 생동감과 강렬한 메시지는 여과없이 그대로 가슴에 와 꽃혔다. 감동 그 자체다. 왜 이런 그림들에 대해 무관심했을까? 귀경길 열차 안에서 ‘4시간 내내 피피티’로 보여준 김 작가의 작품들은 새로 한 장 한 장씩 슬라이드 돌리듯 돌아갔다.

 

팔을 높게 치든 역동적인 노동자들을 그린 작품에서는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으며, 둥그렇게 논바닥에 앉아 새참을 먹는 작품에서는 유년시절 외갓집에서 보았던 정겨운 농촌 풍경이 떠 올랐다. 또한 겨레의 통일을 염원하는 민중들의 모습에서는 어느새 나도 그들의 손을 잡고 있었으며, 고려인문화의날을 그린 작품 앞에서는 나도 그들과 함께 쓰라린 역사의 현장에 서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을 강렬했으며 인상 깊었다. 초원의 풀을 실컷 뜯어 먹은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나는 귀경길 열차 안에서 김봉준 작가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숱한 작품 가운데 유달리 눈에서 뗄 수 없는 그림 한 장이 있었다. 바로 ‘12.3(2024)계엄’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는 키세스 모습의 시민들이 “투쟁은 본능이다. 여기는 민중이 꿈꾸는 거리, 이 세상 속에서 반짝이는 슬픔이여 안녕, 검찰개혁 언론개혁, 12.7 응원봉 시위, 12.21 키세스 농성, 우리는 부수고 다시 짓는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만 희망이다. 희망은 힘이 세다, 부족한 헌재지만 파면이면 용서한다. 제발 8:0 탄핵해, 잠 좀 자자” 와 같은 글귀들이 빼곡했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대통령 파면을 앞둔 4월 3일 밤 김봉준 작가는 광화문 광장에서 날밤을 새웠던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제(20일) 김봉준 작가의 강연이 있기 전 인사동에서 김봉준 작가를 미리 만났다. 그날은 헌법재판소 8인의 재판관들이 했던 ‘역사적인 윤석열 파면의 날’이었다. 김봉준 작가는 4월 3일 저녁 원주에서 차를 몰고 올라와 광화문에서 날밤을 새면서 4월 4일 10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렸다고 했다. 윤석열의 파면을 광장에서 확인한 뒤 저녁 6시 인사동에서 김 작가를 만날 수 있게 주선을 해준 이는 (사)한국사회조사연구소장 김순흥 교수였다. 김 작가는 몹시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얼굴에는 희색이 만면했다.

 

광주의 5.18을 몸소 겪었던 김봉준 작가는 ‘12.3 계엄’ 내내 원주 집에서 상경하여 광화문에서 광장에서 노숙을 했다고 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가 민중미술의 길로 들어섰던 계기는 분명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평생 저의 예술세계를 결정 짓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5.18, 그 무자비한 국가폭력을 몸소 겪으면서 20대 청년이었던 나는 국가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깊은 회의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난 것이 민중예술이었습니다. 회고해보자면 5.18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예술세계를 구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작가는 광주 출신이 아니고 서울 출신이다. 그럼에도 누구보다 광주를 사랑한다. 그의 강연에서 ‘광주 사랑의 마음' 이 뚝뚝 묻어난다. 광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광주의 역사를 사랑하고 광주의 아픔을 사랑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번에 민중예술에 대한 총정리를 광주에서 하게되어 기쁘다.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다니면서 홍대 최초로 탈춤반을 만들고 풍물을 치며 사회현상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 계엄군에 장악된 광주의 상황을 알리고자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암약을 하다가 5.18포고령 위반자로 찍혀 수배자의 신세가 되었다. 그 뒤로부터 취직도 못하고 민주화운동 말석에서 시작한 종군화가, 민주화운동의 종군화가, 민중미술 개척자 길을 걸어왔다. 나의 민중미술 50년에서 배운 결론은 예술철학으로 신명론, 마당 문예론, 한글 붓그림론, 신화예술론, 세계평화 인디제니어스(indigenous, 토착) 팝아트연대론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는 김봉준 작가가 50년 동안 추구하며 걸어 온 예술의 길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그런 관객을 위해 이날 강연에서 작가는 1) 파시즘 유신시대에 문화정체성 찾기 2) 전사의 에너지로 노농 민중현장 속으로 3) 고난의 초월, 혁명과 예술의 길 4) 신화와 예술, 신성한 힘의 원형을 찾아서 5) K컬쳐와 K아트, 세계평화문화운동의 전략이라는 주제로 나눠 각 주제에 맞는 완성한 작품을 제시하며 이해를 돕는 설명을 곁들였다. 김봉준 작가의 ‘50년 예술세계’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마침내 우리문화의 원형인 신화시대까지 작품 속에 반영하게 되었다는 말에 큰 공감을 느꼈다.

 

 

 

 

서슬 퍼렇던 박정희의 유신시대와 전두환 정권의 계엄이 빚은 시대의 참극에 맞섰던 5.18광주 민주화시대를 거쳐 12.3(2024) 계엄까지 김봉준 작가의 한 시대는 ‘그것들에 대한’ 투쟁이요, 저항이요, 극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나이 올해 72살, 그는 ‘이제 나이를 먹었다’고 강연 중간중간 말했지만 나는 그의 힘있는 목소리에서 50년 전, 20대 꿈 많은 미술학도 정신을 읽었다. 그는 절대 늙지 않을 것이다. 민중예술이란 젊음의 상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더욱더 그제 싸목싸목다목적홀에서 열린 ‘민주화운동과 나의 민중미술-창작을 징검다리로 50년을 건너다-’는 주제의 강연은 뜻깊었다. 더 시간적 여유를 두고, 더 많은 이들이 그의 '민중미술, 민중예술' 50년사를 함께 듣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왜? 김봉준 이름 석자야 말로 시대의 희노애락을 오롯이 작품으로 말해온 진정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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