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포크, 그는 누구인가?

  • 등록 2025.05.16 11:26:42
크게보기

근대의 여명기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에 이바지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30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 말 근대의 여명기에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그 어떤 사람보다 여러 가지 이바지를 하고 자기를 희생한 외국인이 있었으니 바로 미국인 조지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였다. 그의 주선으로 1886년 조선에 온 헐버트만큼 그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헐버트의 말을 들어보자.

 

 

“조선의 개방과 관련된 문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인이 된 조지 포크의 조선살이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856년 펜실바니아에서 태어난 포크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아나폴리스의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너무 혈기방장하여 사관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4년 뒤 그는 선두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모든 분야를 기민하게 통달했으며 나이를 앞지르는 조숙성을 보였다.

 

그는 졸업한 뒤 곧 극동지역으로 발령받았다. 그의 명민함은 전문적인 학식과 기술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곧 상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제독의 눈에 들어 부관이 되었다. 일상적인 근무와 별도로 그는 놀라운 속도로 일본어를 습득했다. 그는 타고난 언어학자였다. 나가사키에서 일본인 아가씨를 사귀게 된 것은 바로 이 기간이었다. 그녀는 훗날 포크의 아내가 된다.

 

1882년 워싱턴으로 귀임한 포크는 이듬해 가을 민영익을 단장으로 하는 방미사절단을 안내하는 임무를 맡는다. 조선 사절단이 교육기관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기관과 장소를 시찰할 때 포크는 줄곧 동행했다. 이 과정은 그가 조선 관리들과 사귀고 한국어를 습득할 호기를 제공해 주었다.

 

사절단 일행은 조선의 진보적 정책을 지지하고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였다. 포크 또한 조선의 독립을 열정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는 일본을 따라잡고자 하는 조선인들과 의기투합하였고 특히 서광범과 그러하였다. 마음의 동지가 된 포크가 동행한 가운데 사절단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84년 6월이었다. 이제 포크는 미국 공사관의 해군 무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김선흥 작가 greensprout22@naver.com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프로필 사진
김선흥 작가

전직 외교관(외무고시 14회), 《1402강리도》 지은이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