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위하여(以爲何如, 어떻게 하면 좋은가?)

  • 등록 2025.06.12 13: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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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38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회의에서 대화를 나눌 때 ‘이위하여’(以爲何如)를 자주 말씀하였다. 신하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물었던 것이다. 첫 ‘이위하여’는 세종 즉위년 8월 13일 전위한 일을 명에 아뢸 사은 주문사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새 임금으로 출발하는 것이어서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에 전위한 일을 아뢸 사은 주문사를 구성하다) “임금이 상왕전에 나아가 영의정 한상경(韓尙敬)과 우의정 이원을 불러 명나라에 전위(傳位)한 일을 아뢸 것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세자(世子)의 책봉을 청하였을 때 인준을 받지 못하였는데 또 갑자기 전위하였으니, 중국 조정에서 어떻게 생각할까요."하니, 이때 박은은 병으로 집에 있었으므로 하연(河演)을 보내어 이에 대하여 물었으나, 박은도 역시 확정한 의견을 내지 못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의논토록 하라." 하고, 중국에 가서 전권으로 대답할 만한 사람을 가리어 사은 주문사(謝恩奏聞使)를 삼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판한성 김여지(金汝知)로 사은사를 삼고, 공조 참판 이적(李迹)을 부사로 삼고, 형조 판서 조말생을 주문사로 삼았다.(세종실록 즉위년/8/13)

 

이때는 상왕인 태종도 함께하였다. 이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또한 북방의 문제에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 20년에는 야인 거아첩합을 후대하는 것에 대한 해로움과 이로움을 논의하게 했다.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거아첩합(巨兒帖哈)은 지난 경인년(태종 10년) 2월에 우리 경원(慶源) 고을을 침범하여 절제사 한흥부(韓興富)를 죽였고, 그해 5월에 또 용성에 침입하여 절제사 전시귀(田時貴)와 서로 싸웠고, 임인년 9월에는 여러 종족을 거느리고 경원의 아산을 침범하였으며, 병진년 9월에는 또 속평강(速平江) 여러 부족을 교사(敎唆)하여 우리 경원 읍성을 포위하였다. 전후에 침범하여 사람과 우마를 죽이고 사로잡아 간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함길 온도의 사람들은 분노와 원한이 뼈에 사무쳐서 그놈들의 살[膚]을 씹고자 한 지가 오래 되었다. 〈거아첩합이〉 작년 가을(세종 19년,1437)에는 어린 자식과 아내를 거느리고 경성에 왔는데, 사실은 장차 우리 편 군사와 말이 많은가, 적은가 그리고 사람들의 거처를 염탐하여 도적질하려던 것이었다. 경 등과 여러 대신들은 모두 저들을 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 그들의 족속이 번성한 까닭에 우선 살려 놓으면 그 족속들은 사로잡혀 간 우리 백성들을 돌려줄 것이며, 또 저들을 잡을 때에 우리가 저들의 죄를 다스린다는 말도 없었는데, 올량합 대이내온토(大伊乃溫土) 등이 이에 따라와서 알현하였다. 절제사가 만약 이자를 죽이면 저들을 초무(招撫, 불러 어루만져 위로함)하는 길이 막힐까 염려되며, 또 신의를 잃게 되는 연고로 강화부에다 안치시키고 의복과 식량을 관에서 지급(支給)하여 목숨을 보전하게 하였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만약 거아첩합의 족속이 중국 조정에 가서 호소하여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놓아 보내게 되면, 저들은 장차 중국 조정의 덕으로 여기고 우리를 대해서는 감사하다는 정이 없게 되는 동시에 보복(報復)할 계책을 깊이 생각할 것이다.

 

이제 정부와 여러 조(曹)에서 함께 논의하도록 하였더니, 참찬 최사강(崔士康) 등의 논의는, ‘그대로 강화에 두고 의식을 넉넉하게 주어서 형편이 변해가는 것을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하고, 병조 참판 김효성(金孝誠)의 논의는, ‘그놈이 전일에 변경을 침범한 죄는 용사(容赦)할 수 없으나, 일찍이 경원에 도적질하려 한다는 소식을 알려 준 것은 실로 상줄 만한 것이니, 서울에 불러들여서 그 족속의 귀순(歸順)하는 것을 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으며, 좌찬성 신개 등의 논의는, ‘서울로 불러와서 후대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고, 영의정 황희(黃喜)의 논의는, ‘서울에 머물러 두고 후대하기보다는 차라리 후대하여 본고장에 돌려보내어서 큰 도량을 보여 주고, 그의 자손들의 바람도 위로해 줄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그냥 강화에 둔다면 의식은 비록 넉넉하더라도, 만약 중국 조정의 명령으로 인해서 마침내 제 고장으로 돌아가게 되면, 저들은 장차 ‘조선이 부득이하여 돌려보냈다.’라고 생각하여, 우리를 향해 보복할 마음은 끝내 풀어지지 않을 것이며, 만약 중형으로 처치한다면 한 사람의 거아첩합은 비록 죽더라도 그 족속으로서 복수(復讐)하려는 자가 많아질 것이니, 그렇게 되면 백 명의 거아첩합이 장차 나올 것이다."(⟪세종실록⟫20/1/7)

 

그러면서 다른 한 예를 들었다.

 

"옛날 힐리가한(頡利可汗)이 당나라에 화를 일으켜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므로, 장군 이정(李靖)이 힐리가한을 사로잡아서 궐하에 바쳤는데, 태종은 그를 죽이지 않고 가속까지 죄다 돌려주고, 태복(太僕)에다 관사를 정해 주었으며 나라에서 먹을 것까지 공급하였다. 그 후에 힐리는 방에도 있지 않고 답답해 하여 기분이 좋지 않게 여기므로 태종은 이를 불쌍하게 여기고, 괵주(虢州)에는 사슴이 많아서 사냥을 즐길 수 있다고 하여 자사로 임명하였으나, 힐리는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태종은 드디어 우위 대장군(右衛大將軍) 벼슬을 제수하고 좋은 전지와 집을 하사하였는데, 힐리가 죽자 귀의왕(歸義王)으로 증직하고, ‘그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착한 마음이 지극하였다.’ 하였다. 고금의 제왕으로서 착하지 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목숨을 보전하게 한 것이 다 이와 같았다. 나도 신개 등의 논의에 따라서 병조에 명하여 거아첩합을 서울로 돌아오게 한 다음, 예조에 명하여 가사(家舍)·의복·노비(奴婢)·기명(器皿) 등을 갖추어 주게 하고, 편하게 지내는 낙을 알게 하여 우리에게 대한 분노와 원망하는 마음을 사라지게 하면, 비록 본토로 돌아가더라도 영구히 우리 나라 은덕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니, ‘이런 조항으로써 조치하게 되면 경 등의 뜻은 어떻겠는가. 타당한가 않은가와 이로움과 해로움을 다시 깊이 생각하여서 아뢰라.’ ‘以此布置, 卿等之意以爲何如? 便否利害, 更加熟思以啓’ 하였다." (⟪세종실록⟫20/1/7)

 

북방 여진족에 대해 쳐들어오면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귀순하면 후대하고 아니면 돌려보내거나 벌을 가하면 복수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북방 주민을 포용하려는 세종의 북방정책이 엿보인다.

 

다른 한 예로 대마도에 쌀과 콩을 내리는 양을 조절하는 회의도 있었다.

 

(대마도에 내리는 쌀·콩의 수량을 2백 석으로 정하다) "예조에서 대마도(對馬島)에 내릴 쌀·콩의 수량을 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내가 쌀을 내린 것에 감사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해마다 천석이라도 오히려 줄 수 있다.' 하면서 이어서 근년에 주는 것이 얼마인가를 물으니, 우대언(右代言) 허성(許誠)이 대답하기를, '5백 석도 주고 혹은 3백 석도 주어 본디 일정한 수량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사는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僉意以爲何如? 하니, 모두 계하기를, '2백 석이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세종실록⟫ 10/2/17)

 

이 밖에도 여러 생각할 일을 맞아서는 ‘이위하여’를 되뇌이고는 했다. ⟪조선실록⟫에 나타난 ‘이위하여’는 모두 337건 중 세종 때가 66건으로 조선조 임금 가운데 가장 많다.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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