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거문고 연주로 이웃을 어루만져

  • 등록 2025.06.22 11: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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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0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가 자식의 병으로 근심 중이었는데 강세황이 와서 거문고를 연주해 주었다. 그의 음악은 근심하는 사람은 기쁘게 하고, 병든 사람은 소생하게 하는 듯했다. (가운데 줄임) 어쩌면 그렇게 소리가 맑아서 사람을 감동을 주는가?” 이는 성호 이익의 《성호전집(星湖全集)》에 나오는 글로 강세황이 그림뿐만이 아니라 거문고 연주도 수준급이었으며, 그가 거문고 연주로 슬픔과 기쁨을 주변과 함께 나누었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강세황은 8살에 시를 지을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나 관직에 나가야 할 즈음엔 집안이 기울고, 집권세력에 밀려 벼슬길이 꽉 막힌 데다가 몸도 허약하여 우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강세황은 절망하지 않은 채 그림을 그리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몸과 마음을 닦았습니다. 또 그의 처가로부터 물질적ㆍ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갔습니다. 덕분에 그는 몸과 마음의 병이 사라지고 평화로워졌으며 우울증도 떨쳐 버릴 수 있었지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관직 생활과 예술 활동은 영ㆍ정조의 배려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영조는 61살이 되던 해 그에게 생애 처음 영릉참봉(英陵參奉)이란 벼슬을 제수합니다. 그 뒤 강세황은 문신 정시에 수석 합격하고 정이품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까지 올랐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이익(李瀷), 심사정(沈師正), 강희언(姜熙彦) 등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음은 물론 김홍도(金弘道)와 신위(申緯)를 제자로 두고, 진경산수화를 처음 유행시켰으며, 조선에 서양식 화법을 들여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자기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끝까지 그림을 그리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정진한 강세황은 남들이 포기할 늙은 나이에 정이품 벼슬에 오르는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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