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시(詩)는 철학과 세계관을 고도로 농축한 글이다.
시를 잘 짓고 쓰는 사람을 보면, 사상이 정교하고 감각이 발달한 느낌이 든다. 그만큼 시는 여러 겹의 사유를 덧대어 만든 언어의 결정체다.
시인 고두현과 전(前) 동양시스템즈 대표 황태인이 함께 쓴 이 책, 《리더의 시, 리더의 격》은 좋은 시와, 그에 따른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책이다. ‘시인의 영감과 경영자의 촉이 만날 때’라는 머리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시 짓기와 경영은 영감과 직관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p.11)
시인과 경영자의 닮은 점도 많군요. 둘 다 무언가를 만들거나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시가 ‘가장 짧은 문장으로 가장 긴 울림을 주는 것’이라면, 경영은 ‘가장 희박한 가능성에서 가장 풍성한 결실을 이루는 것’이지요. 시인이 하늘의 별을 우러러보면 경영자는 발밑의 땅을 고르고 이랑을 돋웁니다. 이럴 때 시인의 영감과 경영자의 촉수가 동시에 빛나지요.
책에 실린 많은 시 가운데 이근배가 쓴 《부작란-벼루에게》라는 시가 퍽 친숙하다. 추사 김정희가 1840년, 54살의 나이로 제주도 대정골에 유배되어 9년 동안 먹빛 바다를 보며 벼루가 바닥이 날 정도로 글과 그림에 몰두하던 시절을 담았다.
(p.34)
다시 대정(大靜)에 가서 추사를 배우고 싶다
아홉 해 유배살이 벼루를 바닥내던
바다를 온통 물들이던 그 먹빛에 젖고 싶다
획 하나 읽을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
저 높은 신필을 어찌 넘겨나 볼 것인가
세한도(歲寒圖), 지지 않는 슬픔 그도 새겨 헤아리며
시간도 스무 해쯤 파지(破紙)를 내다 보면
어느 날 붓이 서서 가는 길 찾아질까
부작란 한 잎이라도 틔울 날이 있을까
시에 나오는 부작란(不作蘭)은 추사가 유배지에서 그린 또 다른 작품이다. 난을 그리고도 그것을 그리지 않았다는 제목을 붙이고, “난을 치지 않은 지 스무 해 만에 뜻하지 않게 깊은 마음속 하늘을 그려냈다”라는 글귀를 달았다.
지은이는 ‘저 높은 신필’의 경지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슬프거나 힘들 때, 억울할 때 변함없이 붓을 들며 작품에 ‘웅숭깊은 슬픔’을 우려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저 좋은 일만 겪는 것보다, 수없이 좌절하고 꺾여야 비로소 ‘웅숭깊은’ 글씨가 나온다.
한편, 집착을 버리고자 애썼던 목은 이색의 시도 인상적이다. ‘기심을 내려놓다’라는 시에는 기심(機心), 곧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마음, 책략을 꾸미는 마음’을 내려놓고 정신을 쉬게 하는 것이 약보다 낫다는 생각이 담겨있다.
(p.283)
기심을 내려놓다(息機)
이미 지나간 아주 작은 일들도
꿈속에선 선명하게 생각이 나네
건망증 고쳐준 사람 창 들고 쫓아냈다는
그 말도 참으로 일리가 있네
아내를 놔두고 이사했다는 것 또한
우연히 한 말은 아닐 것이라 싶네
몇 년간 병든 채로 지내온 지금
기심(機心)을 내려놓은 것이 약보다 낫네
고려 말기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삶은 힘들고 고생스러웠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추앙받는 그는 14살에 성균시에 합격한 수재였다. 그러나 여말선초 격변기, 몇 차례 유배와 추방을 당하며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살해당했고, 역성혁명에 가담하지 않아 정적들의 칼날 앞에 서기도 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낙향했지만, 아들들의 죽음으로 얻은 마음의 병이 깊어졌다. 시골집에 은거한 지 2년 만에 부인이 죽고, 그로부터 2년 뒤에 그도 세상을 떠났다. 이 시에는 모든 얽히고설킨 세상사를 내려놓고 쉬고 싶은 마음이 물씬 드러난다.
만해 한용운의 시에서는 여백과 직관의 미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꽃잎이 글자를 가려도 구태여 치우지 않는 마음,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여유와 담백함이 잔잔한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p.174)
춘주(春晝)
따슨 빛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볍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요
지은이는 꽃잎을 구태여 치우지 않는 마음, 그 여백과 직관의 순간에 유마경의 깨달음이 완성된다고 풀이한다. 여백의 사고와 직관의 힘은 그것을 부릴 줄 아는 사람에게 더 큰 선물을 가져다주고, 창의적인 사고와 부드러운 카리스마도 여백의 지혜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이렇듯 시와 경영, 인생사 전반을 접목한 이 책의 묘미는 시와 한 발짝 더 가까워지면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사실 맞닿아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시는 인간의 감정과 생각을 고도로 농축한 글이고, 경영의 본질은 사실상 사람을 잘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니 말이다.
바쁘게 살다 보면, 시 한 편 마음 놓고 읽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오랜만에 시를 음미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조용히 돌이켜보게 하는 미덕이 있다. 더운 여름날, 좋은 시를 읽으며 가슴이 시원해지는 청량한 기분을 느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