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무렵 서울로 떠나는 시공여행

  • 등록 2025.08.07 10:5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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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 오경석,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42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1875년께의 한양으로 시공여행을 떠나 본다. 여행에 앞서 8년 전에 돌아가신 역사학자 강재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근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항상 유의해 온 기본 관점은 우리나라를 은둔의 나라, 정체의 나라로 보는 통속적이고 그릇된 사관을 타파하고, 거친 격랑 속에서 고투해 온 우리 선조들의 생동하는 숨결과 그 발자취를 밝혀서, 근대 민족운동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민족의 얼은 만천하에 현창(顯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파란노도의 시대를 꿋꿋하게 살아가면서 사고하고 행동한 한국 민중의 애환을 되새기면서 그 역사적 의미를 깊이 파헤쳐 보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해 두어야만 하는 것은 극히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것이지만, 한국 근대사는….. 근대 일본의 대한관계사(對韓關係史) 속에 해소되거나, 한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사 속에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헤쳐 나간 발전의 역사라는 점이다. “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한 조각의 자주성도 없는 괴뢰적 <친일파>인 양 결론 짓는” 일인 학자들의 주장을 강재언은 비판하면서 “한국사의 전과정을 일관하는 내재적 발전 법칙을 부정하는,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타율성> 이론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역사적 필연이라고 하는 이론으로서 국내에서 활용되고 있는” 점을 또한 개탄한다. 그는 또한 “갑신정변과 김옥균(1851-1894)의 평가와 역사적 위치를 옳게 정하는 작업은 그와 같은 <타율성> 이론의 투영을 극복하고 한국 근대사의 자주적 발전의 내재적 이론을 명확히 하고, 그 좌절의 원인을 해명하는 데” 긴요하다고 강조한다.

 

강재언의 목소리를 귀에 담은 채 우리는 이제 한양으로 떠난다.

 

 

궁궐을 중심으로 한 북촌에 양반층, 청계천의 수표교를 중심으로 한 중부에 중인층, 이태원, 왕십리 등의 남촌엔 빈민층이 모여 살고 있다. 개화파의 대종사격인 박규수의 집은 북촌의 재동(齋洞)에 있다. 오늘날 헌법재판소의 뜰 안에 백송이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어름에 박규수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박규수의 집에서 약간 위쪽에 이웃하여 홍영식이 살고 있다. 거기에서 홍현 마루로 올라가면 김홍집과 김옥균이 이웃하여 살고 있다. 전망이 좋은 곳이다.

 

아래로 도성이 내려다보인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북악산과 인왕산이 눈에 들어 찬다. 김홍집은 집이 가난하여 식사를 거를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면 김옥균이 밥상을 담장 위로 보냈다고 한다. 김옥균의 이웃집에 서재필이 또한 살고 있다. 김옥균보다 나이가 10여 살 어린 그는 어려서부터 김옥균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는 박규수가 사망했을 때 13살밖에 되지 않았다.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 연배가 못 되었던 그는 김옥균으로부터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김옥균은 조국이 청국의 종주권하에 놓여 있는 굴욕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치욕을 벗어나 조선도 세계 각국 속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일원(一員)이 될까 하여 밤낮으로 노심초사했다. 그는 현대적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현대적 국가로 만들려고 절치부심하였다. ….

 

나는 서광범을 통하여 김옥균을 만났는데, 그때 김옥균 외에 홍영식, 박영효와 인제 와서는 기억조차도 할 수 없는 몇몇의 명사들과도 알게 되었다. 누구누구 해도 나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준 이는 김옥균이었다. 그는 문학이나 평론은 물론이고 음악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의 재기(才氣)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는 그에게 10여 년 연하였으므로 그는 나를 늘 동생이라고 불렀다.“

 

이제 우리는 발걸음을 아래쪽으로 돌린다. 박규수 집의 조금 아래로 현재 풍문여고와 덕성여대 경계쯤에 서광범이 살고 있다. 경복궁의 광화문과 창덕궁 돈화문을 잇는 지금의 율곡로를 건너 조금 내려가면 박영효의 집이다. 현재 종로구 소재 천도교 중앙대교당 자리이다. 왕실 부마였던 박영효의 집은 대지가 지금의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두 배 정도에 달하는 대저택이었다. 그는 이 집을 1883년 말 5,000원을 받고 일본 쪽에 팔았다. 거기에 2층 양옥의 일본 공사관이 들어섰으나 갑신정변 때 주민들이 불태운다.

 

이제 박영효의 집에서 발걸음을 남쪽으로 옮겨 청계천으로 건너가 보자. 중인들이 사는 곳이다. 역관(譯官), 의관(醫官), 천문관(天文)官), 율관(律官, 형률(刑律)에 관련한 일을 하는 관원), 산관(算官, 일정한 사무가 없는 벼슬), 사자관(寫字官,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도화서원(圖畵署員) 등이다. 양반과 상민의 중간층으로서 전문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봉건적 지배에 복무하는 계층이지만 양반보다 개명되고 실력있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외교관에 해당되는 역관은 바깥세상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직종으로서 개화의 마중물 역할을 한다.

 

청계천 수표교 인근에 양반 선량들을 지도한 두 명의 큰 스승이 살고 있다. 한 명은 역관이고 다른 한 명은 의관이다.

 

역관 오경석을 회고하는 아들 오세창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나의 아버지는 조선의 역관으로서 중국에 파견되는 동지사(해마다 동짓달 중국에 보내는 사신) 및 기타 사절의 통역으로서 자주 중국을 왕래하였다. 중국 체재 중 세계 각국이 각축하는 상황을 견문하고 크게 느낀 바 있었다. 뒤에 열국(列國)의 역사와 각국 흥망사를 연구한 결과 조선은 정치가 부패했으며 세계 대세에 크게 뒤처져 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언젠가는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며 크게 개탄하곤 하였다. 중국에서 귀국할 때 각종의 신서를 지참하였다.

 

아버지에게는 평상시 친하게 지내는 우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대치 유홍기(大致 柳鴻基)라는 동지가 있었다. 그는 학식이 탁월하고 인격이 고매하였으며 또한 교양이 심원한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가져온 각종 신서를 동인에게 주며 연구를 권하였다. 그 뒤 두 사람은 사상적 동지로서 결합하여 서로 만나면 나라의 형세가 실로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다며 장탄식하면서 일대 혁신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어느 날 유대치가 아버지에게 우리나라의 개혁은 어떻게 하면 성취될 수 있겠는가 하고 묻자, 오경석은 먼저 북촌(당시 상류계급의 거주구역)의 양반자제들 중에서 뜻있는 동지를 모아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였다.”

 

오경석은 8대에 걸쳐 역관을 지낸 중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5살 때인 1846년 역과에 합격한 이래 22살 때(1853년) 첫 중국 방문을 시작으로 44살 때(1874-75)까지 모두 13회나 중국을 방문했다.

 

 

김선흥 작가 greensprout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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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김선흥 작가

전직 외교관(외무고시 14회), 《1402강리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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