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김옥균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북한의 시각과 평가도 다양하다.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서양인의 평가들도 다수 전해 온다. 오늘은 북한의 평가와 일본의 기록 하나를 보겠다. 먼저 김일성은 1958년 3월 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워회 전원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력사가들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합니다. 다른 나라에는 다 부르죠아 혁명운동이 있었는데 왜 우리나라의 력사에만 그것이 없는가고. 중국에는 강유위나 량계초와 같은 부르죠아 혁명가들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있다고 하면 김옥균을 들 수 있는데 …친일파로 규정해 놓았습니다. 김옥균이 친일파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
다 아는 바와 같이 일본은 동양에서 제일 먼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김옥균은 자본주의 일본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개명시키려 했는데, 훗날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니 결국 그가 친일파로 규정된 셈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여간 토론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한편 일본 흑룡회에서 1933년 펴낸 《동아선각지사기전(東亞先覺志士記傳)》에서는 아래와 같이 김옥균을 선각자로 소개한다.
“자(字)는 백온(伯溫), 고균(古筠)은 호이고 한때 오근두타(五根頭陀)라고도 불렸다. 일본 이름은 이와다 슈카쿠(岩田周作)라 불렀다. 1850년 조선의 양반가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재기가 반발했으며 탁월한 식견을 갖추고 선각의 선비가 되었다. 18~19세 무렵 대원군에게 알려져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진급을 거듭하여 25~26살 때에는 호조판서에 나아갔다. 하지만 조선이 중국의 속국으로서 사사건건 간섭을 당하여 독립국으로서의 면목을 발휘하지 못하고, 따라서 해가 감에 따라 폐정을 개혁할 기회가 없고, 국가로서 마침내 멸하고 말 비운에, 동지 박영효 등과 함께 애국동지를 규합하여 독립당을 조직하고 혁신의 뜻을 달성할 것을 기약하였다. 1880년 불교 연구를 구실삼아 처음으로 일본에 왔다. 그는 후쿠자와 유기치 등에 그 뜻을 알려 조선개혁의 방책을 모의하고, 또 일본의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갔다. 다시 1882년 임오군란 뒤에 조선의 사죄사절이 일본을 방문할 때 같이 일본에 왔다. 그는 일본 조야의 유력자들과 회견하고 일한 양국의 친선에 이바지할 여러 가지 안건을 제시하였으며 국정개혁에 필요한 경비를 은행에서 빌린다는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갔다.
다음에는 앞서 본 김일성의 평가와 일본 쪽의 기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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