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은 1886년 여름 일본 정부에 의해 연금 상태에 있었다. 곧 7월 25일부터 그는 일본 당국의 감시하에 요코하마의 미쓰이 여관에 머물렀던 것이다. 일본 당국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삼엄한 경비를 했다. 그때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시키기로 한 상태였다.
그해 8월 7일께 오사사와라 행 정기 여객선 슈코마루호는 김옥균 일행을 태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다. 이틀 뒤 8월 9일 출발할 것이다. 그날 새벽부터 여관 주위에 30여 명의 일본 경찰이 철통같은 경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몇 명의 경관이 김옥균을 여관방에서 끌어낸다.
“이게 무슨 짓이오? 김옥균 선생을 추방하는 까닭이 무엇이오?” 김옥균과 같이 있던 동지들인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이윤고 등 네 사람이 격렬하게 항의한다. 경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옥균을 부둣가로 끌고 간다. 네 사람의 망명동지는 김옥균의 어깨를 부여잡고 통곡한다. 경관들이 그들을 거칠게 떼어낸다. 김옥균을 태운 배가 멀어진다. 아침 6시 반이었다, 김옥균과 동행을 고집하며 두 명이 배에 올라탄다. 한 명은 조선인 이윤고, 다른 한 명은 일본인 바둑 친구 다무라.
김옥균은 출발을 앞두고 시 한 수를 남긴다.
울적하게 여관방에 갇혀 있던 몸
속박을 떨치고 바깥세상 나왔어라
하늘이 마침 동풍을 보내준다면
오가사와라 천리길도 하루면 돌아오리.
하지만 바다엔 동풍이 아니라 거친 풍랑이 기다리고 있다. 보통 일주일 걸리는 거리인데 악천후로 무려 20일 만에서야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즈음도 쾌속 관광선으로 이틀이 걸린다고 한다.)

그 당시 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영토로 편입된 지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으로부터 이민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황량한, 열대에 가까운 섬이다. 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17도를 넘는다. 김옥균의 표현을 빌자면 천기혹열(天氣酷熱, 날씨가 혹독하게 뜨겁다) 하고 장습여증(璋濕如烝, 습하기가 증기같다)이다. 연중 비가 내리는 날이 190여 일이나 된다. 당시 일본 이주민은 38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오가사와라 제도는 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게 무코지마 열도, 치치지마열도, 하하지마 열도, 가잔 열도 등 네개 열도로 나뉜다. 치치지마는 아버지의 섬이라는 뜻이고 하하지마는 어머니의 섬이라는 뜻이다. 김옥균은 아버지의 섬에 거처를 정했다. 가끔 주민들의 안내로 어머니의 섬도 오갔다.
일본 당국은 김옥균을 이 섬으로 추방하기에 앞서 현지 출장소장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하달했다.
- 김오균 등을 당분간 적당한 민가에 두고 그 집주인으로 하여금 음식을 제공토록 할 것
- 식비는 1인당 평균 6달에 6엔으로 책정함. 단 김옥균과 그 동행자 사이에는 적당한 차등을 둠. 그 비용은 출장소가 매월 정기적으로 집주인에게 지급할 것
- 김옥균 등에 지나치게 정중히 대우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우는 갖추어 줄 것
- 김옥균이 용돈을 달라고 하면 별도 잡비 범위 안에서 1달에 8엔 이내로 지급할 것. 이 돈은 일괄 김옥균에게 주어 그가 배분토록 할 것
- 김옥균 등이 질병에 걸렸을 때는 의사에게 성의껏 진료하게 할 것
- 김옥균이 도쿄에 오고 싶어 하거나 다른 오가사와라 섬으로 가고자 할 경우에는 그 뜻을 자세히 보고하고 본부의 지휘를 받을 것
-김옥균 등의 평소 거동을 예의 시찰하고, 그 결과를 정기적으로 보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