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반의 일생

  • 등록 2025.12.29 11:11:11
크게보기

《조선시대 양반은 어떻게 살았을까》 허인욱, 토토북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양반.

양반은 조선시대 관료층의 양대 축이었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양반은 양반과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회를 이끄는 지도층이었다. 양반이 조선의 법, 제도, 문물과 불가분의 관계였기에 조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양반의 생애를 시기별로 보여주는 이 책, 《조선시대 양반은 어떻게 살았을까》는 김 판서댁 아들로 태어난 똘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일생 전체를 혼인이나 과거급제와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과 함께 보여주는 책이다. 똘이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명문가 자제로 태어나 높은 관직에 올랐던 양반의 인생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다.

 

 

#장면1. 즐거운 책거리 날

옛날 서당에서는 훈장이 학동들이 배우는 책을 완전히 다 익혔다고 판단하면, 자그마한 잔치가 열렸는데 이를 ‘책거리’, 또는 ‘책씻이’라 했다. 책거리는 책을 뗀 학동의 부모가 감사한 마음을 담아 조촐히 음식을 준비해 마련했다. 왕실에서도 이런 풍습이 있어 정조 역시 책거리를 했던 기록이 《홍재전서》에 남아 있다.

 

(p.31)

지난 어린 시절 책 한 질을 읽고 나면 어머님께서 간략한 음식을 차려 주셨는데, 그게 바로 세상 풍속에서 말하는 ‘책씻이’라는 것이었다. 금년 겨울에는 《춘추좌씨전》을 읽었는데, 그것을 다 읽고 나서 어머님께 말씀드렸더니 매우 기뻐하시면서 술과 떡을 준비하여 그 일을 기념하려 하셨다.

 

#장면2. 혼인식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양반의 생애에서도 혼인은 빼놓을 수 없는 중대사였다. 전통적으로 치르는 혼인식을 ‘초례’라 하고, 초례 때 차려 놓는 큰 상을 초례상이라 하며, 초례상을 놓고 초례를 치르는 공간을 ‘초례청’이라 했다. 요즘은 혼인식이 거의 낮에 치러지지만, 그때는 초례청 마당에 큰 횃불을 지피고 저녁에 치러졌다. 초례상을 가운데 두고 신랑과 신부가 마주하고, 초례상 뒤쪽에는 주례가 서서 식을 진행했다.

 

(p.46)

식이 시작되면 신랑이 신부 집에 올 때 가지고 온 나무 기러기 한 쌍을 보자기에 싼 채 안고 들어가 초례상 위에 놓고 절을 해요. 이를 ‘전안례’라고 해요. 그다음 신랑과 신부과 마주보고 절을 하는 ‘교배례’, 신랑과 신부가 서로 술잔을 나누는 ‘합근례’가 순서대로 치러집니다.

 

혼인식이 끝난 뒤 신랑은 보통 사흘 정도 신부집에 묵다가 같이 시댁으로 갔는데, 이를 ‘신행’ 또는 ‘혼행’이라 했다. 그러나 신부집의 형편이 넉넉한 경우에는 신부집에서 수개월 동안 묵기도 했고, 심지어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 머물기도 했다.

 

#장면3. 관찰사, 지방관으로 나가다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관직에 오르려면 적어도 한 번은 지방에서 관리직을 거쳐야 했다. 백성들의 삶을 제대로 모르면서 제대로 된 정치를 하기는 어렵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지방에 부임하는 관리는 꼭 해야 하는 일곱 가지 일이 있었으니, 이를 ‘수령칠사(守令七事)’라 했다.

 

(p.78)

첫째, 농사가 잘되도록 수령이 잘 살펴보았는가? 둘째,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인구를 늘렸는가? 셋째, 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는가? 넷째, 군사와 관련된 일을 잘 다스렸는가? 다섯째, 부역을 공평히 부과하였는가? 여섯째, 잘잘못을 가려달라고 하는 소송을 잘 처리하였는가? 일곱째, 나쁜 풍속을 없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도록 하였는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중요한 일들이다. 그래서 임금은 지방으로 부임하는 지방관에게 수령칠사가 무엇인지 외우게 하기도 했다. 관찰사는 1년에 두 번 자신이 거느리는 모든 지방관에 대해 상, 중, 하로 고과를 매겨 임금에게 보고를 올렸다.

 

#장면4. 정승에 오르다

옛날에도 정승 반열에 오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정승은 ‘의정부’에 속한 정일품 관리로, 특히 영의정은 양반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이었으며 주로 좌의정을 지낸 사람이 임명되었다.

 

(p.85)

좌의정은 커다란 파초 잎 모양 부채 아래 여유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네요. 좌의정이 앉아 있는 가마는 평교자로 정일품 이상의 관리만이 탈 수 있었답니다. 평교자는 덮개가 없었기 때문에 하인 중 한 사람은 해를 가려주는 일산이나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을 항상 들고 다녀야 했어요.

 

 

조선시대 정승이 되었다는 것은, 관료 권력의 으뜸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의 장관이라 할 수 있는 판서급에 그치거나, 거기까지 이르지 못한 이들도 많았으니, 정승이 된다는 것은 가문의 큰 영광이었다.

 

#장면5 회방연, 급제 60주년을 축하하다

‘과거 급제 6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 그것은 바로 ‘회방연’이였다. 과거에 합격하는 나이가 보통 서른이 넘었으니, 회방연의 주인공은 아흔 살쯤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실제 회방연을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회방연이 열리면, 주인공은 과거에 합격했을 때 사흘 동안 거리를 행진하는 ‘삼일유가’를 했던 것처럼 다시 행진했다. 삼일유가와 다른 점이라면 젊었던 시절에는 말을 탔지만, 회방연에서는 가마를 탔다는 점이다. 과거에 합격하고 60년이 지나 회방연까지 치른 사람은 정말 인생 으뜸 복록을 누린 셈이다.

 

양반의 생애에는 이런 명장면도 있었지만, 희로애락을 겪는 것은 ‘보통 사람’들과 비슷했다. 과거 시험에 계속 떨어져서 우울해하기도 했고, 혼인 생활이 순탄치 않아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렇듯 삶의 희비를 겪으며 사는 것은 양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책은 양반의 생에서 일어날 법한 굵직한 사건들을 장면별로 보여주고,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몰입감이 좋다. 다가오는 병오년, 인생의 크고 작은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면 이 책에 나오는 장면들을 떠올려 보며 새해 계획을 세워봐도 좋겠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편집고문 서한범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