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유배는 고달프다.
가시울타리에 갇히는 ‘위리안치형’을 받으면 일단 곤장 100대를 맞는다.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상태로 천릿길을 가다가 병이 들어 죽기도 하고, 섬으로 유배되면 풍랑을 만나 죽기도 한다. 어찌저찌 유배지까지 간다고 해도 가시울타리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는 데다, 언제 사약이 내려올지 모른다는 ‘시한부 인생’의 공포가 짓누른다.
삼평중학교 국어 교사 두 사람이 같이 쓴 이 책, 《유배도 예술은 막을 수 없어》는 거친 유배지에서도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예술혼을 꽃피운 7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책에 실린 허균, 윤선도, 김만중, 이광사, 김정희, 정약용, 조희룡은 오히려 유배가 ‘인생 한 수’라 할 만큼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남긴 눈부신 업적의 태반이 유배지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유배지에서 산다는 건 고달프긴 해도, 한편으로는 그동안 ‘일하느라 엄두도 못 냈던’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마음껏 하면서 시름을 달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조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 또한 유배지에 가서 시조를 짓기 시작했다. 윤선도는 언뜻 생각하면 평탄한 벼슬길을 걸었을 것 같지만, 성균관 유생으로 31살에 첫 유배형을 받은 뒤 50년의 세월 동안 20년은 유배지에 있고, 20년은 은거하고, 10년만 관직에 있었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그의 첫 유배지는 함경도 경원이었다. 한겨울인 1월에 곤장 100대를 맞은 몸으로 함경도 경원까지 걸어간 그는 시조를 지으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정계에서 관료로 이름을 날릴 때가 아니라, 극한의 외로움과 그리움 속에 있을 때 시심이 발동했던 것 같다.
(p.43)
유배지에 도착한 윤선도는 외롭기 그지없었다. 성 밖에 흐르는 시냇물도 울며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고, 가족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짓게 된 시조가 바로 <견회요(마음을 다스리는 노래)>다. 그러면 윤선도는 유배되기 전에도 시조를 자주 지었던 사람일까? 그렇지는 않다. 윤선도는 유배지에서 처음으로 시조를 짓기 시작했다.
경원에서 1년을 보낸 뒤에는 부산의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겨야 했다. 경원에서 기장까지 걸어가는 여정은 가히 국토대장정이었다. 기장에서 7년을 보낸 뒤, 복직해서 일하다가 경북 영덕, 함경도 삼수로 두 번의 유배를 더 거친 뒤 81살이 되어서야 나이가 많다는 까닭으로 풀려났다.
한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로 유명한 김만중도 모두 유배지에서 ‘인생작품’을 썼다. 그는 두 번째 유배지였던 평안북도 선천에서 창작열을 불태웠다. 어린 시절부터 정이 각별하던 어머니가 평소 소설을 재밌게 읽던 기억을 떠올리고, 적적할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을 썼다.
어머니를 위해 쓴 ‘효도소설’ 《구운몽》은 항간에 퍼지며 큰 인기를 얻었고, 다양한 한글본과 한문 필사본이 나오게 되었다. 1922년 조선에 온 첫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번역해 우리나라 첫 영어 번역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유배지에서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확인한 그는 두 번째 유배지인 남해 노도에서도 다시금 소설을 집필한다. 노도는 남해에서도 배를 타고 10분 정도 더 들어가야 하는 정말 외딴 곳이다. 섬의 크기도 무척 작아서,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이면 모두 돌아볼 정도다. 김만중은 그 작은 섬에서 울타리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형을 받았으니, 답답함과 고독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고통을 잊기 위해 더 집필에 몰두해 《사씨남정기》라는 명작이 탄생했다.
김만중은 근엄한 조선 지식 사회에서 대제학까지 지냈던 문장가였지만, 자기 대표작들을 한글로 쓸 만큼 한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한글이 여자와 평민의 글이라고 생각해 무시했던 당시 사대부와 달리, 김만중은 아무리 한문을 잘한다 한들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글을 쓸 때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p.59)
소설에 대한 그의 생각은 더 놀랍다. 대제학까지 지낸 이름난 학자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쓰는 자체가 매우 파격적인 행보였다. 역사와 시문 등 점잖은 글만 쓰는 것이 조선 시대의 선비가 학문을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을 드러내는 글은 한문으로 시를 쓰는 정도가 다였던 폐쇄적인 사회에서 김만중은 매우 열린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유배는 문인과 예술가들에게는 자신도 잊고 있던 재능을 세상에 선보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편안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을 때는 생각나지 않던 시심과 창의성이 ‘유배’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온전히 발현된 까닭이다.
옛사람들의 정신력은 진정 대단했던 것 같다. 유배지에서 거친 환경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도 많았지만, 고통스러운 환경조차 역작의 원동력으로 삼으며 창작을 멈추지 않았던 이들도 많았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았던 덕분에 수많은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 유배의 또 다른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