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속까지 일제 증오'…150명 집단 망명한 '독립운동 명가'

  • 등록 2013.11.07 10: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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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14)] 경북 안동 백하 김대락 종가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금옥(金玉)같은 우리 민족 적의 노예(奴隸) 되단말가
용봉(龍鳳)같은 당당사부(堂堂士夫) 적의 압제(壓制) 받단말가”
 


위 시는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선생이 쓴 <분통가(憤痛歌)> 의 일부로 민족의 자존심을 갖고 당당히 살던 우리 겨레가 왜놈들 아래서 압제와 핍박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한 통한의 느낌을 써 내려간 시다. 조선의 당당한 선비였던 백하 김대락 선생의 후손 김시중 어르신을 찾아가던 날은 내앞마을 콩밭이 누렇게 익어가던 늦가을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전에 한번 찾아뵌 적이 있는 김시중 선생은 경북 안동 내앞마을(川前里) <백하구려(白下舊廬)>에 살고 계시다. 
 

   

▲ 백하구려 전경


<백하구려(白下舊廬)>는 대한제국 시절과 일제강점기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몸 바친 백하 김대락(1845∼1915)선생의 고택으로 사랑채를 확장하여 1907년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역사적인 유래를 간직한 집이다.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광복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어, 김대락 선생의 애국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택 이름을 <백하구려(白下舊廬)>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채에 걸린 '백하구려(白下舊廬)'라는 편액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편액은 이 지역 유생 금상기(琴相基)가 썼다. '백하(白下)'는 김대락 선생의 호이며 '백두산 밑에 사는 한인(韓人)'이라는 뜻이고 ‘구려(舊廬)’는 오래된 오두막이란 뜻으로 가솔을 이끌고 백두산이 있는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을 하던 선생이 살던 집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백하구려에서 할아버지 김대락 선생에 대해 말씀하시는 김시중 어르신
 

안동 최초 근대 교육기관 협동학교 위해 자신의 사랑채 흔쾌히 내놔 


1907년 내앞마을에서 문을 연 협동학교는 류인식 선생 등 혁신 유림이 설립한 경북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다. 의성김씨 문중 서당인 가산서당에서 출발한 이 학교는 1919년 3ㆍ1운동 이후 강제 폐교될 때까지 독립투사를 길러낸 역사적인 교육의 산실이었다.  


하지만, 초기에는 위정척사를 외치며 개화에 반대하던 척사유림의 입장에 신학문의 수용과 단발령을 받아들이는 학생들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극심한 반대를 했다. 심지어 1910년 7월에는 의병이 협동학교를 기습해 교직원 3명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백하구려 마당의 큰 바위는 신학문을 가르치던 교직원들이 피를 흘리며 숨져간 곳이다. 따라서 척사유람이었던 백하 선생도 처음엔 개화와 신교육에 부정적인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의병 투쟁이 곳곳에서 일제에 패하고 나라가 망국의 길로 들어서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1909년 초 선생은 혁신유림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육십 평생 척사유림으로 살아온 선비가 자신의 철학을 완전히 고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민족교육이란 대명제를 앞에 두고 과감히 자신이 살던 백하구려의 사랑채를 협동학교 교사로 쓰도록 기꺼이 내주면서 협동학교 운영에 사재를 털기 시작했다. 


   
▲ 백하 선생이 자신의 거처를 협동학교 교사를 위해 내놓았다는 황성신문 1909년 5월 9일 기사
 
   

▲ 혐동학교를 반대햇던 의병들이 교사들을 죽였던 바위. 현재 백하구려 앞에 있다.


당시 선생의 변화는 안동 지역 뿐 아니라 전국에 영향을 끼칠 만한 큰 사건이어서, 황성신문은 '교남 교육계에 새로운 붉은 기치'라는 제목의 논설로 대서특필했다. 선생은 독립운동 단체에서 발행한 '대한협회보'를 읽고 심경이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늙은이 눈 어두워 죽은 듯이 누웠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를 읽는다. 폐부를 찌르는 말 마디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옷깃을 적시네." 뼈저린 깨달음이었다.
 

만삭 손주며느리‧손녀딸 압록강 건너 출산…막내동생 일제 고문에 눈 멀어|
임시정부 국무령 매부 이상용선생과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강습소 세워 


나라가 기울자 이를 좌시할 수 없어 힘을 모아 독립운동을 하기로 작정하고 선생은 66살의 노구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내앞마을에서 무려 150여 명이나 되는 대부대를 이끌고 독립운동의 선봉장이 되어 떠난 것이다. 선생은 오로지 힘을 키워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1910년 12월 24일 엄동설한 속에 안동에서 멀고도 험한 만주로 떠난 것이다.  


일행 가운데는 선생의 손자며느리와 시집 간 손녀까지 있었다. 이들은 둘 다 만삭의 몸이었는데 망명길에 산기를 느끼자 일제가 짓밟은 땅에서 출산할 수 없다하여 압록강을 넘어 출산하도록 했다는 일화를 통해 선생이 일제침략에 얼마나 단호한 마음을 지녔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한겨울 칼바람을 온 몸으로 받으며 1주일을 꼬박 걸었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간 다음 발이 부르트도록 다시 걸어서 압록강 너머 최종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포에 닿은 것이 1911년 4월 10일이었다. 물설고 낯선 이국땅 허허벌판 눈보라 속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땅은 그러나 반겨 기다리는 사람 없는 춥고 배고픔뿐만이 이들 망명객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만주로 망명한 한인들은 생활기반이 가장 큰 문제였다. 따라서 불철주야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활의 기반을 닦는 한편 백하 선생은 매부인 이상룡(임시정부 초대 국무령)등과 함께 한인 자치조직 경학사를 만들었다. 뒤이어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운동 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조국을 떠날 때 맹세한 조국광복을 위한 일들을 착착 실천해 나갔다.  


   

▲ 백하구려에 걸린 훈장증들, 김대락 종가는 선생과 동생, 조카 그리고 종손까지 모두 6장의 훈장증이 걸려 이 종가의 독립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백하 선생은 1911년 윤 6월 12일 신흥학교 학생들을 위한 “권유문”을 썼는데 이를 보면 선생의 굳은 의지와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금석(金石)은 부서지고 깨질지 몰라도 자유를 향한 열정은 깎아낼 수 없으며, 큰 쇳덩이가 앞에 있어도 진보하는 단체를 막을 수는 없다.”고 했다. 또한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도 대장부의 의기가 솟아난다. 어찌 우리가 나라를 일으키지 않을 것인가?”라고 외쳤다.  


이 글에서 백하 선생은 서양문명에 패배한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우리도 열심히 공부하면 그들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단순한 실력양성론만이 아닌 독립투쟁의 의지도 분명히 밝힌 선생의 사상이자 올곧은 정신이었다.  


황무지 땅 만주에서 선생은 경학사에 이은 공리회(共理會)를 결성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1914년 12월 10일 중국땅 삼원포에서 고국을 떠난 지 4년만인 일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비통한 일이었다. 그렇게도 처절하게 꿈꾸던 조국의 광복과 평생을 올곧은 선비로 살아온 고향땅 내앞마을을 두 번 다시 밟지 못하고 애통하게 숨져간 것이다.  


안동에서 일제의 비위만 좀 맞추면 배부르게 살 수도 있었지만 선생은 그 모든 것을 내동댕이진채 노구의 몸을 이끌고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를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다 이국땅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 일제가 훼손할까 봐 비석을 세우지 않아 백하 선생의 무덤을 찾을 길이 없다. 대신 2002년 안동유림이 의성김씨 선산에 쓴 선생의 빈뫼(허묘)


백하 선생의 무덤은 지금 찾을 길이 없다. 일제가 훼손할까 봐 비석을 세우지 않은 것이 도리어 위치를 알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2002년 안동 유림에서는 의성김씨 선산에 빈뫼(허묘)를 썼다. 그때 역사학자 조동걸이 비문을 지었다. "백하는 유학자, 선비, 계몽주의 민족운동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독립운동 선구자다. (중간 줄임) 세상에 외치노니 지사연 하는 학자가 의리를 찾는다면 여기 와서 물어보라. 애국자연 하는 위정자가 구국의 길을 묻는다면 여기 와서 배우라, 저승으로 가는 늙은이가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지혜를 구한다면 여기 와서 묻고 배우라고 하자."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은 백하 선생뿐이 아니다. 선생의 일가는 일제침략으로 온 가족이 희생되었는데 막내 여동생 김락(金洛 1863~1929)선생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김락 선생은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제 수비대에 끌려가 두 눈을 찔려 11년 동안 장님으로 고생하다 죽은 것은 물론 매제인 이중업은 파리장서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고 조카인 동흠, 중흠도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김락 선생의 시어른이신 향산 이만도 선생을 포함한 온 가족이 일제침략에 맞서 투쟁한 쟁쟁한 집안이다. 또한 김구 선생과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백하 선생의 아들 김형식(1877~1950)도 손꼽히는 독립운동가다.
 

독립운동으로 풍비박산 후손들 술지게미‧초근목피 궁핍한 삶 살기도 


김시중 어르신은 회고했다. “6ㆍ25 직후 먹을 것이 없어 조림사업 하는데서 죽도록 일하고 보리쌀 한 됫박 받아다 먹고 살았습니다. 또 안동소주에 가서 소주아래기(술지게미)를 얻어와 사카린(saccharin, 설탕보다 단맛이 훨씬 강한 인공감미료)을 타서 먹고 온 식구가 취해 누어버린 적도 있었지요. 또 소나무 껍질 먹고 똥을 못 눈 적도 있었습니다.” 


일제의 침략 역사가 없었다면 후손들이 그렇게 힘겨운 세월을 살 까닭이 없건만 냉혹한 역사 앞에 내동댕이친 채 어려운 시절을 감내해야만 했던 후손들의 삶의 모습이 눈앞에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독립운동에 직접 나선 당사자들도 힘겨웠지만 후손들 역시 힘겨운 삶을 이어가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당했던 조상들처럼 후손 역시 반듯한 역사관으로 조상들의 독립운동을 값지게 이야기 하는 모습에서 독립운동이 과거에 끝난 일이 아니라 현재도 면면히 이어지는 민족정신임을 기자는 새삼 인식했다.  


김시중 어르신의 15대 청계공 김진 선생이 후손들에게 당부한 유언에는 “큰 부자가 되지 말 것과 높은 벼슬 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당시 극심한 당파싸움과 부자들의 횡포를 염려하던 뜻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 집안의 분재기를 보면 노비 50명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데 윗대부터 그리 큰 부자는 아니지만 면면이 어려움 없는 살림이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하 선생 대에 와서 있는 재산을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에 모두 쏟아 부었으니 그야말로 남아 있는 것은 빈 숟가락뿐이었음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그 가난과 험난한 현실은 고스란히 후손들의 몫이었다. 


취재 내내 김시중 어르신은 걱정했다. “나눔을 주제로 취재를 하시는데 사실 우리 집안은 그렇게 내로라하는 나눔을 실천하지는 못해서 얘깃거리가 될는지 걱정입니다. 다만 어렸을 때 들은 얘기로는 할아버지께서 주변에 어려운 이들의 굴뚝에 연기가 났는지 물어보시고는 며칠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는 말씀을 들으시면 곡식을 가져다주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구례 운조루나 경주 최부자집처럼 베풀지는 못했던 듯 하여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르신의 겸손의 말일뿐 전 재산을 다 털어 민족교육에 쏟아 붓고 독립자금에 부었다면 그보다 더 큰 나눔이 어디 있으며 값진 나눔이 어디 있단 말인가!  


김시중 어르신은 다음날 경북여성정책연구원 주최 “경북여성, 독립운동을 말하다” 2013 경북 여성인물 재조명심포지엄 행사장에서 다시 뵈었다. 전날 댁에 찾아뵈었을 때와는 달리 단정한 두루마기 차림이 마치 백하 선생을 뵙는 듯하였다.
 

   

                      ▲ 두루마기 차림의 김시중 어르신. 마치 백하 선생을 뵙는듯 했다.


어르신은 다시 강조했다. “우리 집안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당시 조선 사람이면 누구나 했던 독립운동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절대 보태거나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이다. 백하 김대락 종가에 무엇을 보탤 필요가 있을 것인가? 이미 백하 선생의 재산과 삶을 송두리째 이 겨레와 나라에 바쳐 크나큰 나눔을 실천했는데 말이다. 기자는 김시중 어르신과 헤어지면서 엄청난 나눔을 실천한 조상을 두고도 겸손하게 고개를 수그리는 모습에 되레 어르신 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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