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허홍구 시인]
2013년 12월 14일 오늘도 아침은 눈부시게 밝았다. |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회향!
▲ 길상화 보살의 젊었을 때 사진
누구는 죽는 것이 걱정이라 했고 누구는 사는 것이 걱정이라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가 꽃향기처럼 사라져간 한 인물을 다시 기억하며 추모한다.
그녀는 부잣집 딸에서 하루아침에 끔직한 가난의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내 한 몸 희생하여 가족을 책임지겠다.” 는 맘으로 찾아 간곳은 기생조합, 권번이었다.
스승으로 부터 진향(眞香)이란 기명(妓名)을 받았다
당면하게 될 각종 풍파 속에서도 맑음을 잃지 말라는 당부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스물둘, 한창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운 그녀에게 첫사랑이자 평생의 연인인
백석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백석은 중국 전설 속 여인의 이름을 따 그녀에게 자야(子夜) 라는 아호를 붙여줬다.
그들은 사랑하면서도 부부가 되지 못한 채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났었고
연락이 끊어진 채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두 사람은 영원한 이별을 맞았다.
백석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만큼 그녀는 많은 재산을 모아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하게 되었고
1970년대 밀실 정치가 극에 달한 무렵에는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던 그녀가 생애에 높고 아름다운 회향을 꿈꾸며 당시 1천억이 넘는 전 재산을
법정스님을 통하여 무주상보시를 한 것이다.
그녀가 받은 것은 “길상화”라는 법명과 염주 하나뿐이었고
1997년 11월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유언에 따라 첫눈이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그의 유골은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 향락의 상징이었던 대원각은 1997년12월14일 청정도량으로 바뀌었다.
놀이 공간이었던 대연회장은 <설법전>으로, 본체는 <극락전>으로,
고기 냄새와 음악소리로 가득 찼던 공간은 <시민선방>으로,
기생들의 숙소는 수행스님의 <요사체>로,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은 불음을 전하는 <범종각>으로 거듭났다.
당시 이 많은 재산을 내어놓고도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것은 사랑하는 백석 시인의 시(詩) 한 줄보다 못한 것이라 했다.
나는 지금까지 이 만큼 내 몸에 찌르르한 전류를 흐르게 한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그녀가 떠난 그 자리에는 아직도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곳이 <길상사>라는 절이며 그녀의 이름은 김영한 아니 길상화 보살이다.
▲ 길상화 보살이 아름다운 회향을 꿈꾸며 무주상보시를 하여 새로 태어난 <길상사>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은 김영한이고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하였으나 요정 ‘대원각’이 부처님 도량으로 바뀌는 날 전 재산을 보시하고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