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무덤의 부장품을 꺼내 팔아먹기 위해 선조의 무덤에 손을 대는 일을 하는 ‘후레자식’은 한국 정서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그런 “후레자식”이 있었다. 1905년 초대 조선 통감 자격으로 조선에 부임한 이등박문이란 자가 바로 그자다.
1905년 이등박문은 통감자리에 앉자 이미 조선에 와있던 일본인 도굴꾼들과 손을 잡고 맨 먼저 손을 댄 것이 고려청자다. 이등박문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강화도 일대에 몰려 있는 왕후, 귀족들의 분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러한 무덤 털이에 일부 마을사람들이 저항하면 총으로 위협을 가했다.
▲ '청자거북이형연적'은 동경국립박물관에 있었던 고려청자로 이것은 이등박문이 일본 황실에 보낸 103점 가운데 하나다. 한일조약 때 되돌아왔다 (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등박문은 도굴꾼들을 매수하여 무덤을 마구 파헤쳐 고려청자를 파낸 뒤 명치왕과 황족들에게 조선통감의 위세를 자랑하고자 선물했다. 심지어는 골동품상을 통째로 매수하여 고려청자를 입수한 뒤 30점에서 50점을 한 번에 선물하기도 했는데 그 수가 수천 점에 이르고 있다고 《잃어버린 조선문화유산'失われた朝鮮文化遺産'》을 쓴 일본 고려박물관 측은 18쪽에서 밝히고 있다.
▲ 칼찬 순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양 고분을 파헤치는 도굴꾼들, 옆에는 아녀자들이 물동이에 물을 길어 나르고 있다. (1909년 평양)
이등박문의 조선무덤 파헤치기로 도굴한 청자는 일본에서 매우 큰 인기를 끌고 매니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909년 가을 동경에서 <고려청자전시회경매회 ‘高麗靑磁展示競買會’>가 열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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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골동품상과 도굴꾼들을 조종하여 개성일대의 왕릉과 고관대작 무덤이란 무덤은 모두 파헤치게 했다. 당시에 무덤에서 나온 고려청자의 99%는 개성 무덤에서 도굴한 것이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구 이왕가박물관 소장)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청자 6,562점 외에 수천 점은 이등박문이 일본으로 빼돌렸다.
일본으로 빼돌린 게 어디 고려청자 뿐이랴만 조선인들이 하늘처럼 모시는 조상의 무덤을 파헤친 죄는 몇 백, 몇 천, 몇 억겁이 지나도 그 죄를 다 씻지는 못할 것이라고 뜻있는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