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우리 땅 대마도

2015.09.10 21:15:21

[대마도 자전거 기행 ⓸] 미네에서 히타카츠까지

[한국문화신문=이규봉 교수]  오늘의 여정은 고작 50킬로미터 남짓이다. 그래서 좀 늦은 아침 8시에 출발했다. 길 양쪽에는 키가 큰 삼나무들이 즐비했다. 오늘도 터널이 여러 개 나왔다. 어떤 터널은 자전거가 지나갈 정도로 충분한 갓길이 있지만 없는 곳도 있었다. 

 

   

▲ 대마도 미나토(溱) 마을에 있는 "박제상 순국비"(네이버 "K-27" 블로그 제공)


조금 지나니 바로 이웃한 가미아가타마치(上縣町)에 들어선다. 중심 마을인 사스나(佐須奈) 못 미쳐 사고(佐護) 만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미나토(溱) 마을이 나오는데 길가에 박제상의 추모비가 있다고 한다. 박제상은 신라의 외교가로 고구려와 일본에 가서 당시 신라왕인 눌지왕의 동생을 구출하였다. 이에 일본에 있던 박제상은 유배되었고 일본 왕이 자신의 신하가 되어 달라는 제안을 거절해 처형되었다. 이와 같은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88년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박제상이 순국한 곳으로 알려진 이곳에 순국비를 건립했다. 


음료수 자동판매기의 천국 


한 40킬로미터 가니 바다와 접한 오우라(大浦) 마을이 나온다. 여기가 한국전망대로 가는 갈림길이다. 함께 가기 위해 뒤쳐진 동료를 기다렸다. 앞에는 음료수 자동판매기가 있다. 정말이지 대마도에는 길가 곳곳에 음료수 자동판매기가 있다. 굳이 물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 약간 비싸지만 필요할 때마다 시원한 음료수를 마실 수가 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때다. 날이 더워 가지고 다닌 물이 다 떨어졌다. 물을 마시고 싶었으나 가게나 식당은 270여 킬로미터나 되는 둘레길 전역에 거의 없다. 많은 물을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 지리산 둘레길에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곳곳에 일본처럼 음료수 자동판매기를 설치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걱정도 든다. 인적이 드문 곳에 설치된 자동판매기가 얼마나 오래 버틸지. 


왕인의 이름을 딴 와니우라 한국전망대 

 

   

▲ 자전거와 함께 한국전망대 앞에 선 필자


   

▲ 조난당한 조선 역관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돌비석


오우라에서 일반현도를 타고 다시 언덕을 올라갔다. 정상에서 좀 내려오니 왼쪽으로 이정표가 있다. 도로에서 한 400미터 비켜 올라가니 와니우라 산마루에 한국전망대가 있다. 오르자마자 오른쪽에 커다란 비가 눈에 띈다. 제단 위에는 앞 바다에서 조난당한 조선 역관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내용의 돌비석이 세워져 있고 제단 앞에 있는 비에는 당시 희생당한 역관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1703년 음력 2월 5일 대마도주가 사망하자 이를 조문하는 동시에 또한 다음 대마도주의 세습을 축하하기 위하여 조선의 역관들이 방문하였는데 와니우라 앞바다에서 갑자기 변한 악천후로 배가 전복되어 112명 전원이 사망한 일이 있었다.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1991년 3월에 한일건립위원회에서 세웠다. 

 

   

▲ 한국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모습


한국전망대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이 와니우라이다. 여기서 ‘와니’라는 호칭은 일본에 학문을 전해준 왕인 박사를 높게 받들어 ‘왕님’이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 호칭이라고 한다. 와니우라 해변에는 한일 교류의 첫 번째를 보여주는 ‘백제국 왕인 박사 현창비’가 세워져 있으나 안타깝게 우리는 거기까지는 가보지 못 했다. 와니우라 마을에는 대마도를 상징하는 이팝나무가 많은데 한반도에서 전해져 간 나무이며 일본 본토에는 없다. 5월 초에 이팝나무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택시 타고 가면 되지 


한국전망대가 가장 높은 곳에 있어 히타카츠까지는 내리막길이어서 달리는 데 아주 수월했다. 전망대에 올라오지 않고 먼저 간 일행을 쫓아 내려달렸다. 지나다니는 차는 매우 적었다. 아직도 더 가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저 앞에 국제선박터미널이란 간판이 보였다. 


오전 11시였다. 출발한지 세 시간만이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샤워였다. 주변 민박집에 요청해 보았으나 안 된다고 한다. 우리가 가려했던 온천은 이곳 히타카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우라 해수욕장에 있다고 한다. 거기까지 또 자전거를 타고 갈 엄두가 안 났다. 점심시간은 다가오고 해서 땀에 절어 찜찜한 상태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화장실을 이용할까 했으나 좁고 손님이 많아 포기하고 에어컨 바람으로 몸을 식혔다. 음식값을 생각해보니 5천 엔이 충분히 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다시 시마토쿠 화폐 한 묶음을 더 사왔다. 그 때 누군가 ‘택시 타고 가면 되지!’라고 한다. 그렇지! 자전거를 묶어 두고 택시를 타고 갔다 오면 되지. 왜 그 생각을 아무도 못했을까? 여유를 부리며 3시에 출발하는 배 시간까지 식당에서 쉬면서 느긋하게 즐기고 있던 우리는 부리나케 서둘러 식당을 나왔다. 


수건 한 장에 100엔 


터미널에 자전거를 묶어두고 택시를 탔다. 택시는 시마토쿠 화폐를 받는다. 온천까지는 한 10분 거리였다. 850엔이 나왔으나 우리는 천 엔짜리 시마토쿠 화폐로 지불했다. 잔돈은 거슬러 주지 않지만 봉사료로 생각하고 주었다. 그리고 나오는 시간에 맞추어 택시를 예약했다. 


온천 요금은 500엔이었고 얇은 수건 한 장에 100엔을 받는다. 욕탕에는 비누만 준비되어 있다. 전면이 완전히 창으로 바라보는 바닷가 풍경이 일품이다.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있어 복잡했으나 역시 한 번에 들어오듯 그들은 시간이 되니 한 번에 모두 나간다. 관광버스로 온 관광객이다. 


다시 예약한 그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받은 표를 주고 1인당 800엔의 항만이용세를 주니 다시 좌석표로 바꾸어 준다. 출국수속은 아주 간편했다. 3시 40분에 히타카츠를 출발한 배는 정확히 4시 50분에 부산에 도착했다. 


히타카츠는 지형이 항구를 만들기에 유리하지만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별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907년을 전후로 포경기지가 건설된 후 대한해협에서 고래를 잡기 위한 중요한 기지로 발전하였고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을 운항하던 부관페리의 기항지 역할을 하면서 크게 번창하였다. 


왜 한국말을 안 배울까? 

 

   

▲ 대마도 지도


대마도는 서비스업 같은 3차 산업이 거의 주류를 이룬다. 여기에 큰 몫을 하는 것이 한국인의 관광이다. 전체 관광객의 99%를 한국인이 차지할 정도로 대마도는 거의 한국에 의존적이다. 도로의 이정표에는 거의 한국말이 함께 있다. 하지만 이에 비추어 한국말을 할 줄 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는 많지 않다. 왜 한국말을 안 배우지? 


관광업이 대마도 주민의 주 수입원이 되다 보니 “대마도이즈하라항축제”, “국경마라톤 IN 대마도” 그리고 “대마도친구음악제” 따위 큰 축제를 하고 있다. 매년 8월에 개최되는 대마도이즈하라항축제의 과거 이름이 대마도아리랑축제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마도아리랑축제는 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를 모방하여 실시하는 400여 명 규모의 조선통신사 행렬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2013년 이름이 이즈하라항축제로 변경된 것처럼 한일간의 정치적인 관계에서 영향을 받게 된다. 


대마도는 찾아야 할 우리 땅! 


대마도는 약 1만 년 전에 형성되었고 빙하기에는 한반도와 연결되어 한반도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 이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섬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유물을 통해 대마도는 우리 영토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 후생성이 세계보건기구와 함께 분류한 <바이러스 지도>에 따르면 대마도에 거주하는 사람은 순수한 우리 핏줄이라고 한다. 


1433년(세종 25) 신숙주가 일본을 다녀와 기록한 지리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따르면 당시 외교 현안이었던 일본이 매년 보내는 배와 바치는 쌀을 대마도주를 설득해 각각 50척과 200석으로 한 계해약조를 체결했다고 한다. 대마도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섬이고 매우 가난해서 해마다 쌀을 차등 있게 주어 대마도는 실질적으로 조선의 지배를 받았다. 


대마도는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타난 대마국(對馬國)이라는 표현을 보았을 때 지금처럼 일본에 속한 영토가 아니라 나름 독자적인 국가였다.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을 하던 대마도는 고려 말 이후 왜구의 본거지로 변한다. 조선정부가 대마도를 정벌하고 경상도의 속주로 편입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대마도를 점령한 것에 항의하는 의병들의 전적비가 대마도 곳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대마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전한다.  

 

   

▲ 대마도는 조선땅(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대마도는 《동국여지승람》이나 해동지도 등 여러 문헌에 표기되었다. 1750년 제작된 해동지도에 있는 설명문은 “백두산은 머리이고 대관령은 척추이며 영남지방의 대마도와 호남지방의 제주도를 양발로 삼는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대마도는 우리의 땅이고 우리 민족의 한쪽 다리 구실을 하였다는 뜻인데 일본이 대마도를 자기들 멋대로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우리나라 역사에 나타난 어떤 나라도 대마도를 어떠한 형태로든 일본에 넘겨주거나 양도한 적이 없다.  


대마도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 수군의 주둔지가 되고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되었다. 194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은 최초로 대마도의 반환을 주장했고 1949년 연두기자 회견에서도 대마도의 반환을 언급했다. 1951년 대한민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작성 과정에 미국 국무부에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냈으나 거부되었다. 우리가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자 일본은 학자들에게 대마도 연구를 하게끔 적극 지원하여 대마도가 일본 땅이라는 논리적 근거를 완성했다.  


그러나 우리는 10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말이 사용된 대마도에 일본의 항공자위대가 1956년에 설치되고 1961년부터는 육군자위대가 주둔하면서 실질적으로 일본의 지배하에 놓였음에도 1965년 한일협정 당시에도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대마도는 일본의 실효적 지배를 받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은 억지 주장을 하면서도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데, 우리는 확실한 역사적 근거가 있음에도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을 못 하고 있다. 이제라도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때가 아닌가? 


<참고도서>
대마도의 진실, 한문희·손승호, 푸른길, 2015
대마도 여행 가는 길, 안준희, 연두m&b, 2015
대마도 역사를 따라 걷다, 이훈, 역사공간, 2005

 

 

이규봉 교수 gblee@pc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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