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머니(장경례 지사)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자고등학교) 제1회 입학생으로 1928년 11월, 동교생이던 장매성, 박옥련 등 11명과 함께 소녀회(少女會)를 만드셨습니다. 조국독립과 여성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된 소녀회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참여하였고 시위 도중 부상을 입은 학생들을 치료하는 등 큰 활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때 어머니 나이 17살 때이셨습니다.”
이는 장경례 지사(1913.4.6.~1997.12.1.)의 따님인 허찬희(83살), 허은회(81살) 자매의 증언이다. 가을 햇살이 따스하던 지난 10월 22일 월요일 낮 3시, 기자는 미리 약속한 장경례 지사의 따님이 살고 있는 수원 광교의 한 아파트를 찾았다. 인형작가인 장경례 지사의 큰 따님인 허찬희 씨 집에는 가까이에 살고 있는 동생 허은희 씨도 미리 와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트 거실 창 너머로 보이는 호수공원에 짧은 가을햇살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어머니 장경례 지사의 학창시절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머니는 당시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잡혀가는 바람에 박옥련, 장매성 등 학우들과 함께 퇴학 처분을 받아 졸업을 못하셨습니다. 일경에 잡혀가 1년이라는 기간동안 감옥살이를 하기 이전에는 비밀결사 조직인 소녀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에 관여하면서 한편으로는 테니스 선수로 뛸 만큼 활발한 학교생활을 하셨지요.”
어머니 장경례 지사의 10대 시절을 더듬어 이야기 하던 두 따님은 어머니의 흑백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을 꺼내 보여주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장경례 지사가 여학교를 다니던 무렵인 1920년대 중반, 조선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확대되면서 학생들 또한 그 영향을 받아 독서회 등 비밀결사 조직의 결성이 눈에 띄게 늘어나던 때였다. 이 무렵,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1928년 11월, 장매성, 장경례, 고순례, 박옥련, 남협협, 암성금자 등의 여학생들이 비밀결사인 소녀회(少女會)를 만들었던 것이다.
장경례 지사 등은 소녀회 결성 이후 동지를 확충하는 한편 매달 한 번씩 월례연구회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높여 나갔다. 이들은 소녀회에서 주역을 맡은 장매성의 오라버니가 이끌던 성진회(醒進會)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광주학생의 항일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치기 위해 1929년 6월에 결성된 독서회 중앙본부와도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장경례 지사)와 함께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장매성, 박옥련 선생과는 오랫동안 연락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장매성 선생은 어머니보다 2살 위였고 박옥련 선생은 어머니 보다 1살 아래였지요. 당시에 어머니가 일본경찰에 잡혀갔을 때 외할머니께서 사식(私食, 교도소나 유치장에 갇힌 사람에게 가족들이 음식을 마련하여 준 음식)을 넣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허찬희 씨는 어머니와 함께 광주학생운동의 주동자인 장매성, 박옥련 지사와의 각별한 인연을 이야기했다.
장경례 지사의 따님으로 부터 사식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백범 김구 선생 어머니가 떠올랐다. 김구 선생 어머니 곽낙원 지사(1992.애국장) 는 아들이 해주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을 처단하고 일경에 잡혀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인천으로 건너와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주고 얻은 밥을 사식으로 교도소에 넣어 주었다.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사랑하는 딸과 아들이 감옥살이 하는 것도 서러운데 끼니마저 사식으로 집어 넣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 땅, 어머니들의 고통을 새삼 통감해보았다.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여 퇴학을 맞은 어머니는 잠시 유치원 교사로 있다가 개성 출신으로 광주로 이주한 아버지(허명학)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께서는 광주에서 백화점을 경영하는 등 개성상인 정신을 발휘하여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그런 바탕 덕에 어머님은 억척스럽게 자녀교육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딸들에게 신교육을 시킨 것은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당시 여자 교육이 적극적이지 않던 시절에 어머니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자고등학교)를 다닌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저희 3자매는 모두 서울에 있는 이화여대로 유학을 했습니다. 여자도 배워야한다는 어머니의 굳은 신념이 아니었다면 우리 역시 교육을 받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올해 83살인 허찬희 씨와 동생 허은희(81살) 씨는 어머니 장경례 지사의 남다른 교육열 덕에 신교육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1930년 9월 30일치 <동아일보>에는 장경례 지사를 포함하여 장매성, 박옥련 등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으로 구속된 여학생들의 공판 관련 기사가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되었다. 기사의 보도 규모만으로도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얼마나 큰 사회적 관심거리였나 알 수 있다.
장경례 지사는 일경에 잡혀 수감되는 바람에 학교에서 퇴학당했다가 1954년 11월 3일에 가서야 전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장경례 지사의 독립운동 시절 이야기를 나누는 대담 내내 두 따님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머니는 독립운동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녀회 동지였던 장매성, 박옥련 선생 등을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지요 ” 라며 겸손해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대부분 “부모님의 공적”에 대해 말을 아끼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여자교육이 지금처럼 일반화 되어 있지 않은 시절, 어렵사리 들어간 여학교에서 독립운동 사실이 발각되어 일경에 잡혀 간 것만으로도 이야기 거리는 넘칠 것이며, 징역 1년이라는 옥고를 치룬 사실 만도 대담거리는 차고 넘치련만 8순의 두 자매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어머니의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경례 지사의 모습을 두 따님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장경례 지사는 큰아드님이 미국에서 하버드대학을 나와 미국 주류사회에서 큰 활동을 할 무렵 미국을 오가며 장성한 손자 손녀들과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고 두분의 따님은 전했다. 장경례 지사는 1997년, 84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으며 돌아가시기 전인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709 묘역에 모셨으며 마침 미국에서 올케언니 가족이 방한 중이라 11월 초순에 어머니 묘소를 찾아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장경례 지사의 삶을 되돌아본 시간은 매우 뜻 깊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