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오려고 하시는 그런 분이시었단다. 엄마의 손은 약손이어서 이마에 닿으면 머리가 안 아프고 배를 살살 문지르면 금시 아프지도 않아 엄마의 사랑엔 병들도 달아나는가 보구나!
![엄마의 손은 약손이어서 배를 살살 문지르면 금시 아프지도 않았다. (그림 이승헌 작가)](http://www.koya-culture.com/data/photos/20190415/art_15550244653105_922d77.jpg)
어릴 때부터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 나는 시름시름 자꾸 앓다보니 7살이었는데도 바람에 날려갈 가냘픈 체질이었고 얼굴은 백지장 같은 애였다는구나! 하여 엄마는 근심 가득하여 내손을 잡고 마을에서 좀 떨어진 소문난 의사 리장춘 한의를 찾아갔단다. 여기저기를 검사하던 의사는 약을 좀 많이 써야 애를 춰 세우겠다는 것이더란다.
돈 한 푼 없는 엄마는 가슴속을 지지누르는 천근 돌에 아픈 가슴을 끌어안고 약 한 첩도 못 사고 내손을 잡고 조용히 의사집 사립문을 나섰단다. 엄마는 나보고 “엄만 꼭 너를 살릴 거야……”. 나는 얼떨떨해 엄마만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란다.
이튿날 엄마는 삼촌네 손수레를 빌어 나를 앉히고 마을의 다른 분들과 함께 산 두개를 넘어 “말무덤장대”라는 산에 갔었단다. 내 기억 속에 그 산은 도처에 나리꽃, 도라지꽃, 방울꽃, 소불꽃…… 이름 모를 꽃들이 곱게도 피어 있더구나! 공기도 시원하구 기분도 좋아서 난 날아 다녔단다.
엄마는 먼저 “고얘밥”이며 그 무슨 이름 모를 풀싹들을 한 움큼 뜯어들고
“싱싱할 때 이것을 먹어, 이건 약이란다.”
“정말?”
“먹으면 힘날 거다. 이제 또 나리꽃뿌리를 캐서 집에가 먹자꾸나. 그러면 네 병은 나아질 거야……”
그리곤 꽉지(괭이)로 열심히 파고 나는 “나리꽃”하고 외쳐 엄마를 불렀다는구나! 어느덧 나리꽃 뿌리도 두 자루 캐었고, 도리지와 다른 나물들도 수레에 싣고 집에 돌아왔단다.
그 다음날부턴 엄마는 나에게 나리꽃 뿌리를 삶아도 주고, 밥가마에 쪄도 주고, 생것으로 메워 반찬도하여 다양하게 먹게 하였단다. 이렇게 아마 네 자루 이상 잘 되게 먹였다는구나. 그밖에도 아침 일찍 가까운 산에 가서 무슨 싹들을 이것저것 뜯어다가 무조건 지키면서 나를 먹였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엄마의 약 처방은 은을 내였고 나는 점차 기력이 왕성해지기 시작하더란다. 그때로부터 50살 넘을 때까지 난 감기한번 모르고 학교에선 개근생이었단다.
그러나 원래 약질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엄청나게 추운 겨울에도 가난으로 인해 옷을 잘 입지 못한 탓이었는지 나의 손발은 얼다 못해 퉁퉁 붓고 끝내는 갈라 터져 속살이 드러나고 피까지 흘렀다하더라. 아무리 수갑과 토시를 껴도 점점 심해가서 따뜻한 집에만 들어서면 나는 너무도 아파 늘 눈물범벅이었단다.
추운 칼바람 불어치는 겨울이었어도 입은 옷이란 고작해야 고무줄바지 위에 검정치마를 입었고 웃옷이란 오빠네가 입던 옷을 넘겨 입었고 세수수건(그때는 채갑수건이라 했다.)과 삼각수건을 쳤을 뿐이었단다. 불어치는 눈보라, 맵짠추위(맵고 짠 추위)를 어찌 이것으로 막을 수 있었겠니?
어린 나는 정말로 집의 애물단지였단다. 엄마는 한숨만 쉬면서 또 토방법(민간치료법)으로 나의 손을 치료해 주었단다.
첫 번째 처방은 “붉은대 조이짚” 곧 대가 붉은색이 나는 조이짚(조의 짚)을 태우면서 그 연기에 손을 쐬라는 것이었단다. 내가 너무도 손이 아려서 “난, 난 아파!…”하면서 달아나면 엄마와 오빠들이 나를 붙잡아 나는 눈물을 흘리고 소리치면서 억지로 이렇게 몇 번을 했던지……
두 번 째 처방은 가지대를 삶은 따뜻한 물에 손을 잠그고 있어야 했단다. 갈라터진 손이라 역시 아려서 참기 힘들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나는 발버둥을 치면서도 달아날 수 없었단다. 역시 이렇게 몇 번을 했던지……
세 번째 처방이었다. 엄마는 나더러 배떨이 (지금의 세수대야 모양의 토기그릇)에 오줌을 누라는 것이었다. 그리곤 그 오줌물에 손을 여러 번 씻으라는 것이었단다. 나는 더럽다고 소리치곤 달아나려 했으나 역시 막무가내였지. 손이 아렸지만 울면서 역시 몇 번을 씻었던지……
네 번째 처방이었단다. 엄마는 우선 큰 오빠에게 “너 오늘부터 참새 5섯 마리 잡아 와야겠다.고 하셨단다.
“왜요? 참새고기 구워 주겠슴둥?”
“아니, 약 좀 할려고.”
하여 오빠는 약이라는 말씀에 아무 대꾸도 없이 밤에 전지불을 비춰가며 새둥지도 들추어 보구, 눈을 쓸고 좁쌀을 뿌려 ‘소보치(키) 새덧틀’을 놓아 멋지게 참새 몇 마리를 잡았단다. 엄마는 이 참새 대골(뇌)들을 꺼내어 나의 언손에 련 며칠 발라 주었단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핀다.”더니 참말로 나의 언손은 점차 아물기 시작하더란다. 그 뒤처럼 동상고약이 있으면야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듯 엄마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에 없었을 수도 있었을 내가 그 후부턴 아무탈 없이 잘 자랐다는구나!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시절 동년을 회억하면 엄마의 사랑을 못 잊어 가끔은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