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대를 상대로 싸우는 티베트 독립군

  • 등록 2019.07.03 1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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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겨울에 샤워를 잘 하지 않는 까닭
다람살라방문기 16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히말라야 산길을 함께 걸은 현철 씨도 보통 여행객은 아니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미소만 짓고 말을 안 했다. 그러다가 약간 친해지자 아주 조금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안동이 고향이며 40살 비혼인 그는 어느 날 절에 갔다가 차를 정성스럽게 따르는 스님의 모습을 보고 감전된 듯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와 절에서 오랫동안 지냈는데, 무슨 사연이 있어서 스님이 되지 못하고 종무소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최근 무슨 사건이 일어나, 절을 떠나 정처 없이 여행 중이라고 한다. 중이 싫으면 절을 떠난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 같은데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현철 씨가 추천한 카페에서 우리는 차를 마시고, 간단히 점심 식사를 주문하여 먹고, 히말라야 산도 바라보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산길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병산은 여기 저기 전화하느라고 바쁘고, 나는 혼자서 달라이 라마 사원으로 갔다. 세 번째 방문이다.

 

이번에는 사원 안에 있는 티베트 박물관을 자세히 관람하였다. 티베트 박물관에는 티베트의 자연 환경, 역사, 문화, 달라이 라마의 탈출과 독립 운동 등에 대해서 수많은 사진 자료를 전시하고 옆에는 영어와 티베트어로 해설해 놓았다. 지금까지 내가 티베트에 관하여 인터넷을 검색하여 알아낸 사실들을 사진과 함께 영어로 읽어보니 한결 이해가 쉬웠다.

 

수많은 사진 중에서 특히 나의 눈길을 끈 것은 히말라야 산맥을 드나들며 중국 군대를 상대로 싸우는 티베트 독립군 사진 2장이었다.

 

 

 

첫 번째 사진은 게릴라 부대인 것 같다. 의복도 허름하고 제각각이다. 신발도 가지가지이다. 모자를 쓴 사람도 있고 안 쓴 사람도 보인다. 왼쪽에서 네 번째 병사는 소년병인 듯 앳된 모습이다. 총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총이 없는 사람도 보인다. 두 번째 사진은 기병 부대인 것 같다. 장비가 보병보다 더 좋아 보인다. 기병들이 탄 것은 말인지 조랑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깃발을 든 병사가 보인다. 가운데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은 듯 아주 다부진 모습이다.

 

이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면서 나는 일제 때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운 우리나라의 독립군이 생각났다. 조선의 독립군이나 티베트의 독립군이나 비슷했을 것이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올 때에 아내와 자식과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늙은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나라를 구하겠다고 독립군이 되었지만 무기는 열악하고, 탄약은 부족하고, 보급은 신통치 않아서 걸핏하면 굶고, 이슬 맞으며 잠을 자고, 항상 쫓겨 다니고, 등등 그들의 신산한 삶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청산리 대첩에 관해 배웠다. 김좌진, 이범석, 홍범도 등이 지휘하는 연합 독립군은 중국 길림성 황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일본군과 10번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다. 기록을 보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1,200명이 죽고 3,300명이 부상당했다.

 

독립군의 전사자는 130명 부상자는 9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내가 역사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뒤 일본 군대는 두 달 동안 독립군의 근거지인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고 2,500호의 민가와 30여 개의 학교가 불에 탔다.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간도 학살 사건 또는 ‘경신참변’이라고 부른다.

 

티베트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몇 번의 전투에서 티베트 독립군이 용감히 싸워 중국 군대를 이겼을지라도 뒤따르는 중국 군대의 민간인 학살은 엄청났다. 티베트 박물관에서 자료를 읽어 보니 1950년에 중국이 티베트를 병합한 후에 중국 군대에 의해 학살되거나 피난하다가 굶어 죽거나 수용소에서 병사하는 등 지금까지 모두 120만 명의 티베트인이 죽었다고 한다. 엄청난 수의 티베트인이 죽은 것이다. 나는 120만이라는 숫자를 읽으면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티베트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사원을 한 바퀴 돌아서 나오는데 한 사람이 인도 억양의 영어로 나에게 질문을 한다. “달라이 라마가 여기 사느냐?” 나는 저택을 가리키며 저기에 산다고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또 질문을 한다. “달라이 라마를 만날 수 있느냐?” 나는 대답했다. “미리 예약을 해야 만날 수 있다.”

 

몇 걸음 걸어가자 다른 인도 사람이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 왜 그럴까? 나도 관광객인데 왜 나에게 물을까? 아하, 모자 때문이었다. 내가 오전에 산 모자가 맘에 들어서 쓰고 나왔는데, 사람들은 그 모자를 보고서 나를 티베트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원 정문의 앞 쪽 낮은 곳에 화장실이 보였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공중 화장실이었다. 내가 내려가는데 한 남자가 화장실 문 앞 의자에 앉아 있다. 그는 나를 보고도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그냥 들어가서 일을 보고 나왔다. 나오면서 보니 다른 인도 사람들은 들어가면서 돈을 낸다. 왜 나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는가? 역시 모자 때문이었다. 나는 티베트 모자 때문에 화장실 사용료 5루피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사원을 나와서 나는 호텔로 돌아왔다. 병산이 내 방을 옮기자고 제안을 한다. 나는 201호에서 한 층을 내려와 병산 옆방인 102호로 짐을 옮겼다. 가까이 있어야 서로 연락하기도 좋고 왕래하기도 편할 것이다. 짐을 옮긴 후에 샤워를 하려고 물을 틀었더니 더운 물이 나오지를 않는다. 샤워를 포기했다. 말이 호텔이지 우리나라의 모텔보다 시설이 훨씬 열악했다.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 난방이 되지 않았다. 고장 난 것이 아니고 아예 난방시설이 안 보인다.

 

그러면 밤에는 추운데 어떻게 잠을 자야 하나? 침대에는 굉장히 크고 아주 두꺼운 하얀 이불이 놓여 있다.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면 충분하다고 티베트 사람들은 생각하나보다. 하기야 유목 생활에 익숙한 티베트 사람들은 호텔방에서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것이 들판의 텐트 안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어제 201호에서 관리인이 전기 히터를 하나 가져다주어 그걸 틀어놓고 잤는데, 너무 시끄러웠다. 오늘 방을 옮기자 관리인이 다시 전기 히터를 가져다주는데, 나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시끄러운 것 보다는 추운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나는 샤워를 잘 하지 않는다. 여름에 땀이 나면 샤워를 하지만, 겨울철에는 땀이 안 나고 나는 샤워를 잘 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이나 할까?

 

우리 아들 녀석들은 하루에 한 번은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샤워를 한다. 나에게 샤워 좀 자주 하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러나 내 대답은, 땀이 나지 않는데 하루에 한번 샤워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물을 아껴 써야 전기를 아끼는 셈이 되고, 모든 국민들이 물과 전기를 아끼면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물과 전기를 아끼면 나라 경제는 물론 지구를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너도 나도 ‘친환경’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환경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주 압축하여 말하면 자원과 에너지를 적게 쓰는 생활이 친환경적인 생활이다. 그렇다면 북한 사람들은 자원과 에너지를 조금만 사용하므로 환경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거지는 최소한의 자원과 에너지만 사용하므로 가장 친환경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나? 그렇게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원과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는 것은 알기 쉽게 말해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환경적인 삶이라는 말은 맞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부자이기 때문에 자원과 에너지를 펑펑 쓰는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는 있지만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환경주의자이다. 법정 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 한경직 목사 등은 모두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다가 가신 분들이다. 내가 볼 때에 세 분 모두 진정한 환경주의자이었다.

 

저녁 식사는 호텔 주방에다가 카레 음식을 101호 방으로 배달해 달라고 주문하였다. 나는 식성이 까다롭지가 않아서 병산이 주문하는 음식을 “나도!”라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병산과 함께 방에서 음식을 기다리는데 오지를 않는다. 시간을 금쪽 같이 여기는 병산이 탁자에 놓여있는 전화기를 잡고 주방 번호를 누르더니 큰 소리로 말한다. “Why not come? Hurry up!” (왜 안와! 빨리 보내!) 나는 병산의 순발력에 감탄했다. 나는 도저히 저런 영어는 할 수 없다. 병산의 영어는 문법에는 안 맞지만 여행할 때에는 어디서나 통하는 훌륭한 생활 영어다.

 

이상훈 교수 muusim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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