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회의에서 대화를 나눌 때 ‘이위하여’(以爲何如)를 자주 말씀하신 바를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다. 관리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해
신하들의 의견을 자주 물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의의 순서는 옛말을 통해 살펴보면 처음이 토론(討論)이다. 들이대고(토, 討) 다투듯 논쟁을 이어간다. 다음 단계는 논의(論議)다.
논쟁하듯 곧 다투듯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의(議)는 문의, 논의, 평의(評議)다. 다음 단계는 의결(議決)이다. 의논한 뒤에는 결정하는 것이다.
토(討)론 - 론의(義) - 의결(決)의 순서로 진행된다.
‘당갱의지’는 이러한 과정에서 ’이위하여‘에 대한 답변의 성격이 있다. 실록에 나타난 몇 ‘당갱의지’의 기사를 보자.
(중국에 전위한 일을 아뢸 사은 주문사를 구성하다) 임금이 상왕전에 나아가 영의정 한상경(韓尙敬)과 우의정 이원을 불러 명나라에 전위(傳位)한 일을 아뢸 것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세자(世子)의 책봉을 청하였을 때 인준을 받지 못하였는데 또 갑자기 전위하였으니, 중국 조정에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하니, 이때 박은은 병으로 집에 있었으므로 하연(河演)을 보내어 이에 대하여 물었으나, 박은도 역시 확정한 의견을 내지 못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의논토록 하라."(當更議之) 하고, 중국에 가서 전권으로 대답할 만한 사람을 가리어 사은 주문사(謝恩奏聞使)를 삼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판한성(判漢城) 김여지(金汝知)로 사은사를 삼고, 공조 참판 이적(李迹)을 부사로 삼고, 형조 판서 조말생을 주문사(奏聞使)로 삼았다. (⟪세종실록⟫즉위년/ 8/13)

세종이 즉위한 일을 명에 보고하는 일이라 중요한 사안일 것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논의하여 결정한 것이다. 병으로 출근하지 못한 박은(당시 찬성사 곧 의정부의 부영의정 급)에게까지 물었던 것이다.
그 외에 몇 가지 신중히 토의했던 논의 안건을 보자.
(동당 시험의 초장을 제술로 할 것인가 강경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다) "동당(東堂, 식년과(式年科) 시험의 초장(初場)에 경서를 강(講) 받는 일은 우리 태조께서 마련하신 헌장(憲章)입니다. 그러하오나 응시자들이 면전에서 강하다가 마치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겨 학문을 꺼리고 무과에 응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실로 국가의 학을 일으켜 선비를 만들어내는 취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사부(師傅)를 성균에 두고, 교관(敎官)을 향학(鄕學)에 파견하여, 봄가을에는 《예기(禮記)》ㆍ《악기(樂記)》를 가르치고, 여름 겨울에는 《시경(詩經)》ㆍ《서경(書經)》을 가르쳐서 제술(製述)로써 선비를 취택할 것을 신은 주청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상의하겠다."(當更議之)라고 하였다. 임금은 여러 대언에게 물으니, 다 아뢰기를, "태조 상왕의 마련하신 헌장이요, 또 명경(明經)을 중히 여긴 것이니, 졸지에 파할 수는 없습니다." 하는데, 유독 유영(柳穎)이 아뢰기를, "강경이 제술처럼 사문(斯文)을 흥왕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은 말하기를, "응시자에게 모여 앉아서 의논을 통하지 못하게 하려면, 제술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세종실록⟫1/2/23)
세종 초기라 임금과 함께 일할 새 사람들을 고르는 방법을 정하는 일이어서 신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술(製述) 곧 글쓰기 능력이냐, 강경(講經) 곧 경전 구절의 해석과 응용 능력이냐를 중점적으로 시험하느냐이다.
다음은 소금 공납에 대한 논의다.
(염한의 소금 공납을 줄이는 것에 대하여 의논하다) 황해도 감사가 계하기를, "염한(鹽干)은 1년에 매호당 소금 24섬을 공납하는데, 심히 괴로워합니다. 공사 노비(公私奴婢)의 공납은 매년 추포(麤布) 1, 2단에 불과하온데, 이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염한의 공납은 너무 중합니다. 반으로 줄여 주기 바랍니다." 하니,
김점이 아뢰기를,
"물고기와 소금의 이익으로 말하면, 그 소출이 무궁하니, 비록 20여 섬을 받는다 해도 과중한 수렴은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 공납으로는〉 나라의 수요에도 모자라니, 〈도저히 줄일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일은 더 의논해야 되오." 當更議之
하니, 김점은 백성들의 소송하는 말과 여러 가지 보고 들은 자지레한 일들을 다 아뢰고, 혹은 자기의 능한 것을 자랑도 하며, 늦도록 국사를 아뢰는데 잠시도 말을 멈추지 않아 전상(殿上)의 사람들은 다 그를 싫어하였으나, 임금만은 그를 잘 받아 주었다.(⟪세종실록⟫1/10/24)
세종은 자기 주장을 앞세우기 전에 여러 사람이 말하면 의견을 듣고 이를 실행하려 했고(諫行言聽 간행언청), 종일이라도 토론(終日討論)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무에 임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