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서울지역에서 금성대왕(錦城大王)을 주신으로 모신 금성당(錦城堂)은 구파발을 위시한 노들 그리고 각실점 세 곳에 있었다. 이 가운데 노들과 각심절 금성당은 1970년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없어졌고, 오직 구파발 금성당만 남게 되었다. 현존하는 구파발 금성당 건축물은 180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이다.
오늘날 조선왕실 후원으로 유지되었던 신당(神堂)이 모두 사라진 현 상황에서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갖추고 있는 구파발 금성당은 매우 중요한 건축적 가치를 지닌다. 건축물은 본채와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금성대왕 등 여러 신을 모셔두고 의례를 베푸는 신당으로 기능한다. 본채 앞으로 행랑채를 두었고, 동쪽으로는 ‘ㄱ’ 자형 안채를 두었다. 안채 형태는 중부지방 민가와도 같은 ‘ㄱ’자 형이며, 동쪽 방은 ‘전(田)’자 형태로 크게 지은 것이 특징이다.
금성당 전체 터 면적은 국가민속문화재 지정구역의 대지 813㎡와 보호구역의 대지 1,871㎡ 등 모두 2,684㎡이다. 이 가운데 건축 면적은 상당 33.13㎡, 하당 16.7㎡, 아래채 41.08㎡, 안채 89.74㎡ 등 모두 180.65㎡이다. 금성당은 2008년 7월 22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되었고, 2016년 5월 25일 샤머니즘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구파발 금성당에서 모셔진 주신(主神)은 고려 제25대 충렬왕(忠烈王, 1274-1308) 때 전라도(全羅道)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 451m) 산신(山神)이 정령공(定寧公)으로 봉해지면서 일컬어진 금성대왕(錦城大王)이다. 고려 왕실에서는 금성대왕 신앙을 본격화하면서 금성산 일대에 사당을 지었다. 그리고 매년 제관과 제물 및 제문을 내리어 나라의 태평성대와 백성의 안녕을 빌었다. 금성대왕 신앙이 한양으로 입성한 후, 조선왕실에서는 구파발의 진관동을 비롯한 노들의 망원동과 월계동 각심절의 세 곳 금성당(錦城堂) 건립과 수도권 금성대왕 신앙 확장을 후원 및 뒷받침하였다.
나주의 금성산(錦城山, 451m)은 마을 진산(鎭山)으로 역할 하면서 나주평야와 영산강을 아우르는 전략적 요충지 구실을 하였다. 지금도 산꼭대기 어느 봉우리라도 올라서면 널따란 나주평야는 물론 굽이치는 영산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가 있다. 외관으로만 보아도 호남의 명산이 아닐 수가 없다. 금성산에 우리나라 최고 명당이 있다는 오랜 소문의 까닭을 알게 할 정도이다.
금성산이 호남 3대 명촌의 하나인 금안동(金鞍洞)을 안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그래서 금성산을 한때는 작은 한양 곧 소경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금성산은 이미 고려 때부터 명산으로 알려져서 왕실에서는 물론이고 민가에서도 신성시하였고, 그 전통은 조선 시대까지 이어져 사전에 포함된 국행 제의로 치제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금성산 신앙에 관한 기록은 1270부터 1273까지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줬다 하여 금성산신에게 상을 내려 보답하도록 한 내용이 충렬왕 3년(1277년) 6월 임진(壬辰)에 기록된 것이 그것이다. 이때부터 금성산은 공식적 국가 제사로 받아들여졌다. 나주가 이토록 고려와 왕건으로부터 주요한 지역이 된 것은 나주 호족 출신의 장화왕후 오 씨가 낳은 아들이 왕건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것이나, 나주가 왕건으로 하여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도록 하는데 주요한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나주는 장보고(張保臯, ?-846)가 죽은 뒤 해상 세력이 결집하여 강력한 힘을 형성하고 있었고, 장보고에 의해 구축되었던 경제기반이 바닷길을 통한 나라안팎 무역거점으로 확보되어 있었던 나주는 왕건으로 하여금 주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와중에 나주 토착세력은 왕건을 지지하였고, 그 힘은 후삼국이 통일의 길로 가게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에, 나주는 왕건이 지역 세력과 연계를 맺은 이래, 고려 시대 내내 어향(御鄕)이라 불리며 중시되었으며 그 위상도 남달랐다.
고려 제6대 임금 성종(成宗, 981-997)이 제사 규정을 정비할 때 금성산 신앙이 등재되었다. 그로써 금성산신제가 국가 제사로 승격되었다. 위상이 높이 격상되면서 국가에서 매년 봄가을, 향, 축문, 폐백을 내리는 이른바 국행제사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국행의례 금성산신제는 나주 지역과 지역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호남을 대표하는 산악제의로 이름을 떨치게 되기에 이렇다.
고려 제25대 충렬왕(忠烈王, 1274-1308) 때에는 금성산신이 금성대왕으로 일컬어지면서 정녕공(定寧公)으로 봉해졌다. 《고려사(高麗史)》 정가신(鄭可臣)전에, 나주 사람이 정가신에게 “금성산신이 무(巫)에 내려서 ‘진도와 탐라 정벌에 있어 실로 내가 힘을 많이 썼는데 장사(將士)에게는 상을 주고 나에게는 녹(祿)을 주지 않음이 어찌 된 일이냐. 반드시 나를 정녕공(定寧公)으로 봉하라’라고 말하였다.” 하여 이 말에 혹한 정가신이 임금에게 간하여 정녕공으로 봉하고 나주 읍의 녹미(祿米,녹봉으로 주는 쌀) 5석(石)을 거두어 해마다 금성산의 사당에 보내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나주의 산악신앙 제의는 왕실이 주관하는 팔관회로 베풀어졌었다. 그런데 팔관회는 산악신앙의 의례였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금성산신제였던 것이다. 이로써 국가 제사로 치러진 금성산신제는 나주 위상을 과시하면서 나주 지역민과 호남 일대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주요한 민간신앙적 성격의 의례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태조 26년 4월 기록에 보면, 당시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일이지만, 팔관회는 천령(天靈) 및 오악(五嶽)과 명산(名山)과 대천(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천령, 용신, 오악, 명산 등은 금성산신제의 때 팔관회를 통해 신앙되었던 토속신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로써 왕실이 주관하는 팔관회 명분의 금성산신제는 토속신을 위한 산악신앙 의례로 펼쳐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당시의 이와 같은 팔관회는 임금이 있는 개경에서나 개최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나주에서도 이처럼 성대하게 개최되었던 것은 나주가 곧 수도인 개경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었음을 공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고려 때의 금성신앙은 당대 최대의 제례였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