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아침 일찍 일어나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면서 방에서 나왔다. 해협을 바라보는 베란다 의자에 앉아서 안사리 책 마지막 부분을 읽기 시작하였다. 얼마 뒤 새벽 기도를 알리는 아잔 소리가 들린다. 거대 도시인 이스탄불에는 수많은 모스크가 곳곳에 있다. 관광 안내서를 보면 이스탄불에는 모두 2,800개의 모스크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스탄불 사람들은 2800곳에서 울리는 아잔 소리와 함께 잠이 깰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지금은 극우 논객으로 유명한 조갑제 씨가 20여 년 전 기자 시절에 쓴 터키 기행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1년 전 기자는 이스라엘에 간 적이 있었다. 예루살렘의 성지로 기자를 안내하던 한 유태인은 “지금 우리가 이슬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렇지 유태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었던 것은 회교, 우리를 가장 탄압했던 것은 천주교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특히 오스만 투르크의 전성기를 연 슐레이만 대제는 포르투갈에서 집단 학살을 당하고 있던 유태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어 많은 지식인과 기술자들이 그의 보호 아래 문화를 진흥시켰다. 지금도 우리는 터키 사람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으며 비록 회교 국가지만 우방처럼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터키 정부는 이스라엘 공군이 터키 상공에서 훈련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이 조치에 격분한 한 광신자로부터 데밀렐 대통령은 저격을 당하기도 했다. (경호원이 막아 저격을 모면했다). 징기스칸, 티무르, 무함마드, 슐레이만 등 유목 민족의 지도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초원의 전통을 지켰다. 전쟁과 군사 분야에서 철저한 복수ㆍ약탈ㆍ파괴를 일삼은 유목 민족들은 종교ㆍ문화ㆍ민족 문제에서는 개방과 관용으로 대했다.
내가 안사리의 책을 읽으면서 이해한 이슬람의 관용을 확인해주는 기록이었다. 내가 이 방문기를 연재하는 중간인 2020년 1월 3일에, 2001년 미국의 9.11 테러 사건에 버금가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명령을 내려 이란군 실세인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이라크의 바드다드 공항에서 무인기로 공격하여 죽인 것이다. 이어서 이란이 이라크 미군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중동 지방에 다시 전쟁과 테러의 위험이 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군 지도자가 “임박하고 사악한 공격을 꾸미고 있었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의 공격을 가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칼라마르 유엔 조사관은 자위권이 인정받으려면 “즉각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고 숙고할 시간이 없을 때”여야 하는데, 이번 공격은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더욱이 남의 나라인 이라크 영토에서 이란의 군 지도자를 공격했다는 것은 주권 침해임이 분명하다.
21세기 지구촌에서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이슬람 광신도가 테러리스트인가? 미국 대통령이 테러리스트인가?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다행히 사태가 확대되지 않고 진정되었지만, 테러분자라는 말을 곰곰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예를 들면, 우리나라 사람은 이등방문을 저격한 안중근을 의사(義士)라고 부르지만, 일본 사람들은 테러분자라고 말할 것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1991년에 소련이 분열되고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후 1992년에 쓴 역사철학서 《역사의 종말》에서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선언했다. 후쿠야마는 기독교 세력인 미국 유럽과 이슬람 세력인 중동 국가와의 오랜 충돌에서 자본주의에 근거한 자유 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이제 남은 일은 전 세계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평화로운 번영의 시대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후쿠야마는 낙관론을 펼쳤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선언한 것은 성급했다. 2001년의 9.11 테러 사건 이후 이슬람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급증하고 많은 사람은 왜 이슬람이 그처럼 폭력적인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내가 안사리의 책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읽어본 바에 따르면 이슬람이 기독교에 견주어 더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내가 새롭게 이해한 이슬람은 관용의 종교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도 왜 중동 지역에는 테러 사건이 끊이지 않으며, 왜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가 되었을까?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에는 역사와 종교와 문화와 석유자원 등등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 안사리의 책은 그런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었다. 안사리 책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그날, 2001년 9월 11일, 두 개의 세계사는 충돌했고 그로써 한 가지 결론이 확실하게 내려졌다. 바로 후쿠야마가 틀렸다는 것이다.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랄랄라 게스트하우스는 간단한 한식을 아침 식사로 제공한다. 국도 있고, 김치도 있고,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식사 뒤에 커피를 마시면서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었다. 주인장은 이스탄불에 산 지가 10년이나 되고 터키에 관해서 잘 알았다. 그에게서 재미있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첫째, 터키의 젊은 여성들은 거의 히잡을 착용하지 않는다. 완고한 부모가 히잡을 강요하면 집에서는 입지만 집을 나오면 벗어버린다고 한다. 한 세대가 가기 전에 히잡은 사라질 것으로 예상한다.
둘째, 터키에는 소매치기가 없다고 한다. 유럽의 도시를 여행할 때에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을 지겹도록 듣는데, 터키에서는 소매치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아주 드물게 외국에서 온 소매치기가 있을 수는 있는데, 현장에서 붙잡힌다고 한다. 그가 직접 목격한 바에 따르면 길거리에서 어느 여성이 소매치기를 당하여 소리를 쳤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터키 남자가 3명이나 달려들어 소매치기를 추격하여 붙잡았다고 한다. 당신이 외국에서 원정 온 소매치기라고 가정해 보라. 작업 환경이 이처럼 위험한 이스탄불보다는 프랑스의 파리나 이탈리아의 로마에 가서 소매치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터키 사람들의 친절에 대해서도 주인장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했다. 주인장의 말에 따르면 터키 사람들이 친절한 것은 분명한데, 오래 살다 보니 때로는 친절이 귀찮게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라고 했다. 친절이 너무 지나치다는 이야기인데, 어쨌든 나 같은 단기 여행객에게 터키는 여행하기 좋은 나라임은 틀림없다. 특히 한국 사람에게 형제의 나라 터키는 여행하기에 너무나도 편하고 좋은 나라이다.
우리 일행은 오늘 하루 이스탄불을 관광하기로 했다. 우리는 숙소를 나와 배를 타고 해협 건너편으로 갔다. 마침 출근 시간이어서 가방을 들거나 구두를 신은 회사원이 배에 많이 탔다. 배에서 내려 깃발을 들고 걸어가는데 경찰이 특이한 행색의 병산을 검문했다. 병산이 유인물을 주면서 몇 마디 하자 경찰은 금방 미소를 띠며 병산과 함께 셀피를 찍었다. 내가 병산을 따라 순례 여행을 하면서 여러 차례 본 익숙한 장면이다.
전철을 타고 가다가 아야소피아 근처 역에서 내렸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건축물이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아야소피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아야소피아(Ayasofya)는 터키어로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330년에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나서 새로운 성당의 건축을 명령하여 360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이 성당은 화재와 폭동으로 두 차례나 불에 탔고, 532년에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이전 성당과는 완전히 다른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을 짓기로 하였다.
그는 밀레투스의 건축가 이시도로스와 트랄리스의 수학자 안시미오스에게 새 성당의 설계를 맡겼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제국의 전역에서 기둥과 대리석들이 공출되었으며, 심지어는 지중해를 건너오기까지 하였다. 이때 로마나 에페수스 같은 고대 도시에서 워낙 많은 양의 기둥들을 빼왔기 때문에, 현재 아야소피아를 이루는 기둥들은 각각 다른 크기와 색을 가지고 있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무려 10,000명이 넘는 인력들이 동원되었으며, 아야소피아는 그 시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건축을 시작한 지 5년 만인 537년에 아야소피아의 완공을 선포하였다.
537년부터 1453년까지 아야소피아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머무는 곳이었다. 다만 콘스탄티노폴이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점령된 1204년부터 1261년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십자군이 물러나자 다시 정교회 성당으로 복귀하였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1453년부터 1935년까지 약 500년 동안 아야소피아는 성당이 아니고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세속주의를 추구한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는 1935년에 아야소피아를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바닥에 깔려있던 카펫을 치우고 벽의 회칠을 벗겨내자 옛 모자이크들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박물관을 종교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일절 금지하다가 2006년에 터키 정부는 박물관 내의 작은 방을 기도실로 지정하고 아야소피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허가하였다.
2013년부터는 아야소피아의 첨탑에서 하루에 두 번씩 오후에 아잔 시간을 알린다. 2018년 3월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야소피아에서 "이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준 우리의 선조들, 특히 이스탄불의 점령자"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며 코란의 첫 구절을 낭송하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모스크를 박물관으로 바꾼 것이 '아주 큰 실수'라고 말하면서 아야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되돌릴 것이라고 2019년 3월에 공언하였다. 그렇지만 아야소피아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 때문에 모스크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유네스코의 허가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