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풍수학의 종조 도선국사의 옥룡사터

2020.11.30 12:45:36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한국인의 풍수지리학에 대한 관심은 이땅에 터를 잡고 집짓고 살면서 부터로 생각된다. 한국은 사계절이 분명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렸하고 겨울 추위와 여름 더위가 매우 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여름이면 더위와 함께 매우 습기가 많아 견디기 어렵고, 겨울은 메마른 혹독한 추위가 심하여 또한 견디기가 어려운 자연환경이다. 이러한 자연조건은 사람이 사계절을 살아야 하기에 그 대비책을 세우기가 매우 어려우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은 그 어느 곳에 사는 사람들 보다 더 예민하고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 또 이런 곳에 사는 동식물도 특별하여 동물들은 민첩하고, 식물은 뿌리와 열매에 특별한 약효가 있다고 한다.

 

이런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은 자연을 탐구하였다. 추위를 잘 넘기기 위하여 집안에 불기운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여, 이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없는 온돌(구들=구운돌)을 발명하여, 불기운을 방바닥으로 보내어 방안을 따뜻하게 하고, 그 냄새, 연기와 먼지가 가득한 불기운 찌꺼기는 방바닥을 거쳐서 뒤쪽 굴뚝으로 빼내는 기술을 수천년 전부터 연구 개발하여 극도로 발전시켰다. 이제 이 온돌(구들)은 요즈음 한국의 국력이 뻗어남과 함께 난방(煖房) 한류로 거듭나 세계 각지로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방바닥에는 구들을 놓아 나무탄 재가 없이도 따뜻한 온기를 최대한 방안에 머물도록 활용하였다.

 

또, 여름이면 장마와 습기가 많은 무더위를 피하여 살기 위하여 태양의 직사광선을 가리고, 바람이 잘 통하는 집을 짓기 위하여 연구한 결과, 집의 배치는 거실을 남쪽에 둔 남향집으로 하면서, 집 앞마당을 나무가 없이 넓게 하여, 햇볕에 습기가 말라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바람의 길을 만들어 냈다. 그 덕에 자연스럽게 바람이 일어나 자연풍의 발생으로 통풍을 유도하여 대청 앞뒤로 툭 터진 문을 달아 무더운 여름이지만 시원한 집을 짓고 살아왔다. 또 겨울이면 낮아진 태양의 고도를 이용하여 볕이 방안까지 들어올 수 있는 집이 될수있도록 가능한 집의 방향을 남향으로 택하였다.

 

이처럼 한국인은 오랜 옛날부터 아무리 작은 집이지만, 여름을 위하여 마루를 깐 대청을 만들고 겨울을 위하여 방바닥을 덥히는 구들을 만들어, 부엌에서는 방안에 불을 때면서도 조리를 할 수 있도록 아궁이를 만들어 에너지의 낭비를 최소화 하고자 하였다. 그런 원리로 지어진 한국의 집은 아무리 작은 초가집이라도 3칸은 되었다. 그 3칸은 대청(여름용), 방(겨울용), 부엌(조리실)이다.

 

이런 한국인의 지혜를 과학적 학문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신라말 도선국사의 풍수지리학이었다. 그런데 이런 풍수지리학은 건강과 에너지의 활용이라는 과학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좋은 땅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건강상 좋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아 자손이 번성하고, 재물이 불어나며, 자손이 높은 관직에 오른다는 도참사상으로 풀이하였다.

 

도선국사는 풍수사상에 도참사상을 가미함으로써 그 믿음에 경외심까지 더해 풍수적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감히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사상이 발달하고 너무 깊어지게 되자 조선시대 양반 선비들은 자손의 발복을 위하여 전국에 숨어있는 천하제일 명당자리를 찾아 나섰다.

 

이들은 남이 차지한 명당터를 빼앗기 위하여 많은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흥선대원군이 자손을 왕으로 발복시키고자 당시 유명풍수가의 말을 듣고 고려시대 큰고찰로 조선말기까지 많은 스님들이 수도하던 충남 예산 가야사의 스님들을 내쫓고, 절터에 불을 질러 태워버리고,  최고 명당터라고 풍수사가 지정한 가야사 대웅전 자리에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 이곳에 이장하였다.

 

그런 가운데 구한말 일본인의 눈으로 본 전통 풍수지리학은 길흉화복을 논하면서 각종 비리의 온상이 되고, 땅의 형세를 통하여 복받는 땅을 구하고자 풍수사들의 논쟁만 부축이는 폐습으로 반드시 버려야할 못된 폐악아자 미신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을 대하는 서양과학이 한국인에 받아들여지면서부터 한국의 자연도 더이상 경외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제 자연은 생명이 없는 무생물로 활용의 대상일 뿐으로 전락하였다. 이때부터 자연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철저히 파괴되어가기 시작하였다. 토지는 그 위치가 어떻게든 집짓지 못할 곳이 없게되어 온나라 곳곳에 난개발현상이 벌어지고 그것이 현대적 발전의 상징이 되어갔다. 이런 생각의 변화는 산과 강과 들과 바위로 이루어진 한국의 자연을 더 이상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풍수지리학에서는 집터가 아닌 자리에 집을 지으면 당장 자신에게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 해가 될 것이라는 경고까지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연을 감히 해치지 않으면서, 조화가 잘되는 곳을 찾거나, 좋은 터로 만들기 위하여 비보법을 활용하여 부족한 땅을 명당이 되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풍수학을 따르는 마음이 깊어진 뒤로는 명당이 아닌 곳에 조상의 묘를 쓰면 묘에서 나쁜 기가 뿜어져 나와 자신과 자손들에게 큰 해가 미칠 것이라 생각하여, 흉한 터는 결코 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은 자연의 지나친 훼손을 절대 금기시 하였고, 터가 아닌 곳에는 감히 천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경외심을 가지고 살았으며, 명당이 되는데 조금씩 부족한 부분은 보완하는 기법을 활용하여, 명당이 되게 하는 기법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옛 집터 절터 궁궐터 들은 하나같이 명당자리였던 것이다. 이렇듯 자연에 대한 터잡기를 자연 과학적 이론에 길흉화복론을 더하고, 그 중에서도 부족한 부분을 보하고, 넘치는 부분을 감하는 기법을 학문적으로 체계화 하였던 사람이 바로 한국풍수지리학의 종조인 도선국사였다.

 

이제 현대적 과학과 최첨단의 건축토목기술이 발달하여 자연을 당연히 극복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시대가 되고보니, 파괴되어 가는 자연환경의 현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사람이 살기에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1,000년전 체계화한 도선국사의 풍수지리학이 새삼스럽게 재조명되고 있다.

 

그런데 전국에 수많은 명당터를 잡아 절을 지었고, 온 나라를 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옥룡사를 지은 뒤 수많은 제자들을 교육시켰다던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하는 도선국사의 고향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가 남겼던 실제 <옥룡사> 그리고 그의 삶의 자취였던 <승탑>과 그의 행적을 자세히 밝혔던 <탑비>마저도 남은 것이 없었다.

 

옥룡사터 안내문에 따르면 옥룡사는 조선 후기인 1878년 화재로 불탔고, 이후까지 절의 동쪽 비석거리에 있던 도선국사와 통진대사의 <승탑>과 <탑비>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 경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후 폐허가 되어 묻혀있던 것을 1997년부터 발굴조사를 통하여 건물터를 찾아내고, 땅기운을 돋우기 위하여 잡목을 베어내고 동백나무 숲을 조성하고, 주변에 차밭도 일구었다. 그런데 얼마나 철저히 파괴하였는지, 절터에는 제대로된 주춧돌 하나 보이지 않았고, 승탑과 탑비 또한 예전 유구가 없어 보였다.

 

최우성 기자 cws01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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