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국립숙박시설 '혜음원터'에 가다

2020.12.28 12:14:39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파주시에 있는 혜음령 고개는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와 인접해 있어서 가끔 지나다녔지만 혜음원(惠蔭院)은 들어보지 못하던 곳이다. 코로나19로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집에서 머지않은 용미리 마애불상을 보러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혜음원터(惠陰院址)를 가게 되었다. 혜음원터는 용미리 마애불상으로부터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었다.

 

길찾개(내비)는 평소 익숙하던 도로를 지나 약간 낯선 좁은 골목길로 안내했다. 겨우 차 한 대 지나갈만한 산길에 이르러 길찾개가 도착이라는 안내를 해줬다. 차에서 내려 산길 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드넓은 계단식 집터가 눈에 들어온다. 혜음원터와 마주친 순간 양주의 회암사터가 떠올랐다. 한눈에 봐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집터였다.

 

이곳에 왜 이렇게 어마어마한 집터가 있는 것일까? 혜음원터 안내판의 깨알 같은 글자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궁금증이 이내 풀렸다. 한마디로 이 집터는 고려시대에 세운 혜음원(惠蔭院)이라는 국립숙박시설이 있던 자리였다. 당시 혜음원은 남경(서울)과 개성을 통행하는 관료 및 백성의 안전과 편의를 위하여 고려 예종 17년(1122)에 건립한 숙소 건물과, 절 그리고 임금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궁을 갖춘 복합센터였던 것이다. 건물이 남아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지만 남아 있는 것은 깨진 기왓장뿐이었다.

 

건물은 고사하고 고려시대 국립숙박시설이었던 혜음원은 역사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야했다. 자그마치 877년 간 역사에서 잊혀 있다가 1999년, 주민의 제보에 의해 겨우 발굴의 첫삽을 뜨게 되었다. 이 조사에서 혜음원(惠蔭院)이라고 새겨진 암막새가 발견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2004년까지 지속적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2005년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 사적 제464호로 지정되었으니 건립 이후 883년 만이다.

 

흥미로운 것은 혜음원 조성에 관한 김부식(1075~1151)의 기록이다. 김부식은 《동문선(東文選)》 권64기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 혜음원의 건립 배경과 그 과정,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 등을 자세히 밝혔다.

 

김부식에 따르면 개경과 남경(서울)을 오고가기 위해서는 혜음령 고개를 넘어야하는데 이곳이 워낙 골이 깊고 초목이 무성하여 호랑이가 나올뿐더러 밤이 이슥할 때 강도들이 사람을 해치기도 하여 골머리를 겪는 곳이라고 했다. 한번은 예종임금이 신하인 소천(少千)을 남경(서울)에 출장을 보냈는데 소천이 돌아와 혜음령 고개에서 1년이면 수백 명의 백성이 강도에게 살해당한다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이 말을 들은 예종은 신하 소천에게 “어찌하면 백성의 폐해를 줄이고 안심하게 이곳을 왕래할 수 있느냐?” 고 물었다.

 

이에 소천은 절(혜음사)을 짓고,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을 위한 숙박시설(혜음원)을 지어 놓으면 밤길을 걸을 필요가 없으니 강도의 폐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임금으로부터 국립숙박시설 종합 센터 계획의 전권을 일임 받은 소천은 묘향산의 증여(證如) 스님 등 16명을 선발하여 절과 숙박시설을 짓는데 앞장서게 하였다. 국립숙박시설 혜음원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파주시는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단계적으로 혜음원터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고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와 (재)한백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조사를 하여 혜음원의 전체 규모와 구조 및 역사적 성격을 밝혀냈다. 혜음원터는 숙박시설인 원(院)터, 절터, 별궁터로 구성되었으며 전체 면적은 23,930㎡(7,251평)이다.

 

혜음원은 산등성이를 계단식으로 깎고 다져서 모두 11단의 건물터를 조성하였다. 둘레에는 기와를 얹은 담장을 설치하여 외부와 구분하였다. 담장 내부는 모두 37개동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문선(東文選)》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 따르면 행궁은 임금이 남경(서울) 방문시에 머물기 위해 지은 것이며, 절은 혜음원의 관리와 유지를 담당하는 승려들이 사는 곳이고, 원(院)은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와 일반 민간인들이 머물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혜음원에서는 흉년이나 전염병 등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주변 지역의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였는데 살기 어려운 백성들이 도둑이나 강도로 돌변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드넓은 혜음원터에 서니 앞이 탁트이는 게 호텔이라도 지으면 딱 좋을 만큼 시야도 좋고 경사도 그리 심하지 않은 자연속의 명당 같아 보였다. 혜음원이 고려 예종 17년(1122년)에 완성되었으니 2020년으로 치면 898년째다. 약 900년의 세월, 저 너머 고려인들이 내가 서있던 혜음원터에서 숙박하며 개성과 남경(서울)을 드나들었다니 타임머신이라도 탄 느낌이다. 깨진 기왓장 하나에서도 고려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이곳 혜음원터에는 파주시에서 방문자센터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이다. 지금은 황량한 혜음원터 밖에는 달리 볼 것이 없지만 머지않아 방문자센터가 완성되면 차 한 잔을 마시며 혜음원터의 역사와 고려인들의 삶을 새겨볼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혜음원터 가는 길: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241

승용차 외의 접근은 쉽지 않으며 길찾개(내비)로는 '혜음원지'라고 찍어야 나온다. '혜음원터'라고 하면 좋을텐데 관청에서 혜음원지(惠陰院址)라고 부르니 길찾개도 그렇게 써야 검색된다.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터도 벽제관지(碧蹄館址)라고 하고 여주에 있는 고달사터도 고달사지(高達寺址)라고 부른다. 지(址)는 터이므로, 혜음원터, 벽제관터, 고달사터 이렇게 관청에서 고쳐부르길 바란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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