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목사 이형상이 남긴 제주살이 명장면

2021.01.18 13:05:07

순력은 끝나도 그림은 남아
국립제주박물관, 《그림에 담은 옛 제주의 기억 – 탐라순력도》 전시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장군이 바다를 끼고 열흘 동안 섬을 도는데

문관과 무관에 더해 목축하는 재주까지 겸해야 하지

성을 지키는 이는 무기를 다루는 법이 편안하고

향교의 유생들은 자리에 모여 간신히 공부하네

쟁반에 오른 회남(淮南, 중국 전한의 제후왕국)의 과일 오물거리며

제주의 명마가 있는지 장부를 샅샅이 살펴보네

수많은 노인들이 연회에 모여드니

예부터 장수의 고장, 봉래(蓬萊)라 불렸지

 

               - 이형상, 「순력을 기록함(巡歷紀行)」, 《탐라록(耽羅錄)》

 

1702년 3월, 제주목사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제주에 부임한다. 제주목사는 전라도관찰사의 권한을 위임받아 제주 각 현의 현감을 관리하고 병마수군절제사라는 군사 직책도 겸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부임한 뒤 6달 동안 크고 작은 민생을 살피던 그는 10월 28일부터 11월 18일까지 약 21일 동안 현장 시찰, 곧 순력(巡歷)을 떠난다.

 

순력은 관찰사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로, 도내의 각 고을을 돌아보며 왕명을 거행하고 민생과 풍속을 살피는 일이었다. 관찰사의 역할을 위임받은 제주목사도 제주 섬 안 3개 고을을 순력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이형상 목사 역시 10월 그믐날 순력을 시작하여 과거시험을 주관하고 중앙에 진상할 말을 점검하는 등 각종 공무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제주에 유배와 있던 전 이조판서 오시복(吳始復)과 가까이 지낸다는 까닭으로 부임 1년만인 1703년 3월, 갑작스레 파직되었다. 별안간 제주생활을 정리하게 된 그는 떠날 채비를 하면서, 제주목 소속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지난 1년 동안 제주를 둘러본 각종 기록을 그림으로 남기게 했다. 이리하여 순력 장면 28면을 포함한 41면의 그림과 오시복의 서문 2면으로 구성된 화첩 《탐라순력도》가 완성되었다. 말하자면, 제주도지사에서 해임된 뒤 짧았던 제주생활을 추억하는 기념 화첩을 제작한 것이다.

 

이런 귀중한 화첩 원본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전 <그림에 담은 옛 제주의 기억 – 탐라순력도>가 2월 14일까지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탐라순력도 원본과 더불어 제주목사 이형상의 주요 저작과 유품, 조선시대 지방관들의 대표적인 기록화 등 당시 시대 상황과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17건의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전시는 모두 5부로 구성된다. 탐라순력도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순력 장면을 집중 조명하는 1부 <순력의 기억>에서는 전시장 전면에 배치된 탐라순력도 화첩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첩의 특성상 아쉽게도 한 번에 2면밖에 볼 수 없는데, 현재 전시되고 있는 면은 ‘대정양로(大靜養老)’과 ‘대정배전(大靜拜箋)’이다.

 

대정양로는 순력 중 대정현에서 베푼 노인잔치 광경이 그려져 있으며, 대정배전은 대정현에서 시행된 배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배전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지방관이 머무는 곳에서 임금에게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의 뜻을 표하는 의식을 말한다. 전시면은 주기적으로 교체되어 시기별로 다른 면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전시면 교체 일정은 국립제주박물관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2부 <탐라순력도의 제작자들>에서는 화첩의 주인공 이형상 목사가 쓴 다른 저작과 더불어, 화첩에 서문을 쓴 오시복이 이형상 목사에게 보낸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그는 제주에 부임하기 전 강화지역의 국방 대비책을 숙종에게 알리고자 《강도지(江都志)》를 저술하기도 했으며, 제주목사에서 파직된 뒤 형 이형징의 사위였던 윤두서의 부탁으로 제주 인문지리지 《남환박물(南宦博物)》을 저술하기도 했다.

 

 

오시복이 이형상 목사에게 보낸 간찰에서는 탐라순력도 제작에 얽힌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교래(橋來, 제주 조천읍 교래)에서의 사냥 장면을 화공을 시켜 그림으로 남겨둘 것을 권했고, 실제 탐라순력도에 <교래대렵(橋來大獵)>이 실린 것으로 보아 화첩 제작에 그의 권유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형상은 파직당한 뒤에도 오시복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으며, 이를 증명하듯 화첩에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오시복이 그 뒤 보낸 서신에는 아직도 서문을 다 쓰지 못해 괴롭다는 내용이 담겨있어 슬며시 웃음을 자아낸다.

 

3부 <그림에 담긴 지방관의 길>에서는 지방관이 공무를 보는 모습이나 부임하는 행차를 담은 다른 그림을 선보인다. 사진이 없던 시대, 탐라순력도처럼 지방관의 행차를 기념하여 그림을 남기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고, 특히 영광스러운 부임 장면을 그린 것이 많았다. 그러나 지방관의 통치 행위를 그린 작품은 많지 않은 가운데, 북쪽 변방 함경도에서 치러진 과거시험을 임금의 은혜로 표현한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가 눈길을 끈다.

 

 

 

4부 <기억 속 제주 풍경>에서는 탐라순력도의 각 장면을 영상으로 구현한 작품이 준비되어 있다. 박물관 측은 한 번에 2면밖에 볼 수 없는 화첩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초고해상도 디지털 스캔작업을 진행, 화첩의 모든 면을 대형 영상으로 제작해 관람객이 전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한 벽면 전체를 가득 채우는 영상의 수려한 미감은 300년 전의 제주로 돌아간 듯, 생생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5부 <호연정의 나날들>에서는 제주를 떠난 이형상 목사가 경북 영천의 호연정(浩然亭)에 은거하면서 30여 년 동안 저술에 매진한 나날을 보여준다. 제주를 떠날 때 벗 오시복은 한라산 단향목(향나무)으로 만든 거문고를 선물했고, 그는 이별선물로 받은 거문고 하나와 몇 권의 서책을 안고 화북포구를 떠났다. 이형상 목사가 제주를 떠나는 이 장면은 화첩이 완성된 뒤 제일 마지막 장에 추가되었으며, 그림의 제목 ‘호연금서(浩然琴書)’는 넓고 큰 마음으로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는다는 뜻으로 제주를 떠나는 마음을 잘 담아냈다. 이 거문고 역시 이번 전시에 출품되어 두 선비 사이의 절절한 교분을 말없이 보여준다.

 

 

 

 

큰 바다 깊다고 해도 이별의 한보다는 깊지 않으리니

받아보니, 두터운 정 한라산만큼이나 높습니다

하늘 가득 밝은 달이 두 마음을 비춰줄 때는

홀로 서재에서 이 거문고와 마주하지 않으리까

신세는 도리어 속세를 벗어난 스님 같으셨고

꿈에선 노을 속 우뚝한 층층의 옥 같으셨죠

단향목 거문고의 가는 글씨와 맑은 시 소중하여

이같이 아름다운 선물 백 명의 벗보다 낫습니다

 

             - 이형상, 「오시복 대감이 써주신 거문고의 명문에 차운하여」, 『탐라록』

 

호연정에 돌아온 그는 평생을 학문에 몰두하면서 142종 326책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예학(禮學)에서부터 역사, 지리, 음악, 시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저작이 이곳에서 탄생했고, 탐라순력도 역시 이곳 호연정에서 오롯이 보관되다 1974년 세상에 알려졌다. 탐라순력도가 공개된 직후부터 이 화첩은 제주에 있어야 한다는 열망이 컸지만, 1999년 제주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2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후 화첩을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표지에 덧대는 배접지로 쓰였던 58장의 《제주속오군적부(濟州束伍軍籍簿)》까지 발견되어 작품의 가치가 한층 더해졌고, 각종 특별전과 상설전에 출품되다가 2017년부터 휴지기를 가진 뒤 올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지방관의 순력을 담은 유일한 화첩이라는 점은 물론, 가장 오래된 제주 지도인 ‘한라장촉(漢拏壯囑)’과 더불어 정방폭포, 성산일출봉 등 ‘그림같은’ 제주 자연경관을 실제 그림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전시를 꼭 챙겨봐야 할 까닭이다. 코로나19로 사전예약을 해야만 입장할 수 있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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