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대신 ‘내 서재’ 마련의 꿈을 키워라

2021.05.17 11:44:45

조선 지식인 8인 8색 서재 탐방기
《최고의 서재를 찾아라》, 김주연ㆍ지혜라 / 창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자신만의 서재 갖기,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꿈꿔봤을 일이다. 서재를 꾸리고, 이름을 붙이고, 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를 흠뻑 느끼는 방법도 없다.

 

그러나 막상, 그런 공간을 정말로 가진 이는 매우 드물다. 다들 마땅한 공간이 없어서, 서가를 채울 책이 충분치 않아서, 서재를 꾸릴 시간이 없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서재 만들기를 주저하거나, 막연한 동경의 대상으로 남겨두곤 한다.

 

이렇듯 ‘서재’라는 공간은 여전히 일상의 영역으로 편입되지 못한 채 생경한 느낌을 주지만, 독서와 사색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나아가 인생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면 서재, 한 번쯤 만들어볼 만하지 않을까?

 

새삼 ‘서재’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해 줄, 눈이 번쩍 뜨이는 책을 찾았다. 어린이책으로 나왔지만, 어른이 읽어도 깊은 깨달음을 얻기에 손색이 없는 이 책 《최고의 서재를 찾아라》가 이번 주의 주인공이다. 조선을 빛낸 8명의 지식인이 자신만의 서재를 꾸리게 된 과정, 그리고 그 서재가 자신의 삶에 가져온 변화를 담담히 회고하는 방식이다.

 

 

책은 ‘최고의 서재 공모’라는 커다란 방이 붙은 것으로 시작한다. 심사 기준은, ‘책 향기가 나며, 서재 주인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 이 기준에 따라, 마지막 후보에 8개의 서재가 올랐다. 공교롭게도 서재의 주인은 모두 조선 후기,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책장 한 번 안 넘기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아 외로움에 부들부들 떠는 책들로 가득 찬 서재는 1차 탈락 대상이었어. 가려 뽑고 가려 뽑아 최종 관문에 오른 서재는 이러했지. 작고 허름하나 서재에 담긴 뜻이 크고 깊으며, 책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자들의 서재였어. 최종 후보자 명단에는 정약전, 홍대용, 정조, 정약용, 박지원, 황상, 김정희, 이덕무가 있었어. (p.6)

 

이후 각 서재 주인들의 인생 역정과 서재를 만들게 된 사연이 펼쳐진다. 전반부는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이자 물고기 연구소로 활용했던 ‘복성재’, 홍대용이 서양 과학을 다룬 책들과 망원경을 두고 하늘의 운행 원리를 탐구했던 ‘담헌’,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두려운 마음을 이기기 위해 밤새 책을 읽던 공간이자 자객의 침입으로부터 목숨을 지켜준 ‘존현각’,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네 가지 바른 뜻’을 생각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문과 집필의 공간으로 삼은 ‘사의재’와 ‘다산초당’이 나온다.

 

후반부에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자신이 가는 어느 곳이나 배울 거리를 찾았던 연암 박지원의 서재 ‘연암’, 강진에 유배 온 정약용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깨치고 평생 스승을 그리워하던 황상이 나이 예순둘에 마침내 지은 자신만의 서재 ‘일속산방’, 추사 김정희가 글씨가 새겨진 낡은 돌덩이의 완고함과 고집스러움이 마음에 들어 ‘글씨가 남아 있는 고집스러운 돌’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인 ‘잔서완석루’, 형편이 가난해도 책만큼은 손에서 놓지 않아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로 불린 이덕무를 위해 벗들이 지어준 ‘청장서옥’을 만날 수 있다.

 

그 가운데 정약전의 복성재와 정약용의 사의재는 유배의 좌절감을 헤치고 학자로서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학문으로 어떻게든 세상에 보탬이 되기 위해 만들었던 공간이라 애틋함을 더한다. 두 형제는 피를 나눈 가족이자 서로의 학문을 알아주는 둘도 없는 지기였다. 그러나 신유박해로 한 명은 흑산도로, 한 명은 강진으로 보내져 장장 20년에 가까운 유배를 견뎌내야 했다.

 

참으로 감동적인 것은, 비참한 운명에 좌절하며 그저 하루하루 연명할 법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학문으로 세상을 이롭게 할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특히, 정약전에게 ‘창대’라는 소년은 물고기를 연구하면서 만난 둘도 없는 제자이자 고된 유배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준 벗이었다. 이런 창대와 함께 물고기 도감 《자산어보(현산어보)》를 쓴 과정은 최근 영화로도 제작돼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생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는 정약용도 형 못지않았다. 정약용은 처음에는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점차 희망을 품고,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 겸 연구실 ‘사의재’를 열었다. ‘사의재’는 맑은 생각, 단정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을 마땅히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유배 온 지 8년 만에 두 번째 서재인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0여 년을 살면서 500여 권의 책을 썼다. 지식인의 본분은 자신의 지식을 책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것이라는 신념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정약용이 유배 시절 가장 아꼈던 제자가 바로 황상이다. 가난한 아전의 아들로 변변한 글공부 기회를 얻지 못했던 황상은 한양의 이름난 선비가 강진에 유배와 서당을 열자 용기를 내어 가르침을 청했다. 정악용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성심성의껏 공부를 가르쳤고, 황상은 이후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평생 스승을 그리워했다.

 

형편이 가난해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정약용이 물려준 학문에 대한 열정과 꿈을 놓지 않았던 그는 예순둘의 나이에 마침내 자신만의 서재를 지었다. 무려 7년에 걸쳐 지은 이 작은 서재의 이름은 좁쌀 한 알이라는 뜻의 ‘일속산방’. 조그마한 공간이나 평생 소원했던 학문을 연마하는 공간을 갖게 되자 기쁜 마음에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에게도 이 소식을 알렸고, 강진 유배 시절 아버지의 서당에서 황상과 같이 2년 동안 학문을 배웠던 그도 뛸 듯이 기뻐했다.

 

 

이렇듯 산속에 조그마하게 지은 서재도 진한 여운을 남기지만, 그야말로 ‘임금의 서재’였던 정조의 존현각 역시 그 서재의 주인이 겪었을 고뇌와 두려움이 그대로 전해져 묵직한 감동을 준다. 정조는 불과 열한 살의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한 뒤,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에 둘러싸여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손 정조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왕이 되려면 두려움과 정면승부를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두려움을 이겨낸 방법은 바로 모두가 잠든 시간, 새벽에 홀로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 시간이 정조를 강하게 했고, 즉위하기까지 무려 14년을 두려움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버텨내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늦게까지 책을 보며 깨어 있었던 덕분에 존현각에 침입한 자객도 물리치게 됐으니, 그야말로 존현각은 ‘목숨을 지켜준’ 목숨 같은 서재였다.

 

 

혼자 고요히 서재에 앉은 시간, 그 시간이 진짜 자기 힘을 키워줘. 어린 시절 일기장을 보면 나는 늘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하다고 써 놨어.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신 뒤, 세상이 두려웠으니까. 그 두려움은 이불 속에 숨는다고 없어지지 않아. 두려움을 한 꺼풀씩 벗겨 내려고 조용히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 그렇게 고요한 시간이 없었다면, 그렇게 나를 키우는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내 목숨과 자리를 노리는 자들 때문에 벌벌거리면서 살고 있을 거야. 고맙게도 내 서재가 두려움에서 나를 지켜줬어. (p.65)

 

그래서 필자는 이 책에 실린 모든 서재가 훌륭하지만, 최고의 서재로 존현각을 꼽고 싶다. 열한 살 나이, 비참한 죽음을 맞은 아버지에 이어 자신이 다음 목표물이 된 불안감,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책을 읽었을 세손 정조의 고뇌가 너무나도 선연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미칠 듯한 두려움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고 책으로 두려움을 달랬던 정조의 서재, 존현각은 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살려낸 활인(活人)의 공간이었다.

 

이렇듯 서재가 한 사람의 인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오늘이라도 자신만의 서재를 가꾸어 보면 어떨까? 그리 번듯하지 않아도, 책이 몇 권 없어도 주인의 뜻이 묻어나고 책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면 책상 한 칸이라도 충분히 멋진 서재가 될 수 있다. 옛 선비처럼 서재를 가꾸고, 서재의 이름을 짓고, 그 속에서 나를 키우는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새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저만치 물러갈 것이다.

 

전 국민이 ‘내 집 마련의 꿈’ 대신 ‘내 서재 마련의 꿈’을 갖는다면, 좀 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이 책으로 어린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내 서재 마련의 꿈’을 키워준다면, 세월이 흘러 자연히 책을 읽는 공간을 마련해 학문을 가까이하는, 그런 멋진 어른이 더 많아질 것 같다.

 

《최고의 서재를 찾아라》, 김주연ㆍ지혜라 / 창비 / 13,000원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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