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국보 지정

2021.06.23 11:17:52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한 삼신불 조각이자 독보적인 초대형 규모
울진 불영사 불연(불교의례용 가마) 등 3건도 함께 보물 지정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보물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을 국보로 지정하고, ‘울진 불영사 불연’을 비롯해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송시열 초상‘ 3건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국보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求禮 華嚴寺 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교조각 가운데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로 이루어진 ‘삼신불(三身佛)’로 구성된 유일한 작품으로 조선 시대 불교사상과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아 왔다.

* 삼신불: 법신(法身)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보신(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화신(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말하며 화엄사상에 근원을 둔 도상으로서, 변상도(變相圖)나 사경(寫經) 등에는 종종 보이지만, 조각품으로는 화엄사 사례가 유일함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奉安)된 3구(軀)의 좌상은 1635년(인조 13년) 당대 유명한 조각승인 청헌(淸軒 또는 淸憲)과 응원(應元), 인균(印均)을 비롯해 이들의 제자들이 만든 17세기의 대표적인 불교조각이다. 모두 3미터가 넘는 초대형 불상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삼신불의 복장유물 등 관련 기록이 최근 발견되었으며, 이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 때 소실된 화엄사를 재건하면서(1630∼1636),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삼신불을 제작한 시기(1634∼1635년)와 과정, 후원자, 참여자들의 실체가 더욱 명확하게 밝혀졌다.

 

 

 

발원문에 따르면 전국 승려집단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지낸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의 주관 아래,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 1589∼1645) 부부와 선조의 사위 동양위 신익성(東陽尉 申翊聖, 1588∼1644) 부부 등 다수의 왕실 인물과 승려 580여명을 포함한 모두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 벽암 각성: 화엄사 삼신불 조성 불사를 주관한 승려. 임진왜란 이후 완주 송광사, 법주사, 화엄사, 쌍계사 등 전란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큰 절의 중창 불사를 주도해 조선 후기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임

* 의창군 이광: 조선 중기 종친으로, 선조(宣祖)의 여덟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빈 김씨(仁嬪 金氏). 1618년 광해군 모반죄로 주살된 처족 허균(許筠)의 사건에 연좌되어 훈작을 삭탈 당하고 유배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종친으로서 인조의 총애를 받았음. 글씨를 잘 써 전국에 많은 현판과 비명(碑銘)을 남겼으며, 화엄사와도 인연이 깊어 1636년 <지리사화엄사> 현판 등이 전래되고 있음

* 신익성: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예가. 12살 때인 1599년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음. 척화파 가운데한 명으로, 1642년 중국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기도 했음.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그림에 대한 안목도 높아 당대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함

 

 

삼신불좌상은 화려한 연꽃을 갖춘 대좌(臺座, 부처의 앉는 자리)와 팔각형 목조대좌에 다리를 서로 꼰 결가부좌(結跏趺坐) 자세로 앉아 있다. 거대한 규모와 더불어 단순하면서도 선이 굵게 처리된 조각 솜씨로 인해 중후한 느낌을 더한다. 이 삼신불상은 당시 가장 유명했던 조각승 집단인 청헌파와 응원ㆍ인균파가 참여한 만큼 표현에서도 각 유파(流派)의 조각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근엄한 표정의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상은 청헌파가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는 반면, 부드러운 얼굴에 작은 눈과 두툼한 눈두덩이가 표현된 노사나불상은 응원과 인균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국보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청헌, 응원, 인균과 제자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여 완성한 기념비적인 대작(大作)으로, 이는 불사를 주관한 벽암 각성, 의창군 이광 등 왕실의 후원이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제작된 목조불상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고, 조각으로 유일하게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여래불로 표현된 삼신불 도상이라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고 중요할 뿐 아니라 예술ㆍ조형적 수준도 조선 후기 불상 중에서 단연 돋보이므로 국보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보물 ‘울진 불영사 불연(蔚珍 佛影寺 佛輦)’은 1670년(현종 11) 화원(畵員)으로 추정되는 광현(廣玄), 성열(性悅), 덕진(德眞) 등이 참여해 조성한 2기의 불교의례용 가마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약 20기의 조선 후기 불연(佛輦, 가마) 가운데 형태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사례다. 불교목공예의 일종인 불연이 보물로 값어치를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불연은 불가(佛家)의 불보살상(佛菩薩像), 사리(舍利), 경전, 불패(佛牌, 불보살의 존호나 발원내용을 적은 나무패), 영가(靈駕, 불가에서 망자를 뜻하는 말) 등 예배의 대상을 가마에 싣고 의식이 거행되는 장소로 모셔오는 시련의식(侍輦儀式)에서 쓰이는 매우 중요한 의식법구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불연은 모두 17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고, 그 가운데서도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반면 ‘울진 불영사 불연’은 2기 모두 1670년이라는 분명한 연대와 승려 학종(學宗)이 좋은 장인을 만나 불연을 제작하게 된 배경, 제작에 동참한 시주자, 불연의 제작자로 추정되는 스님 등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교목공예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균형미를 갖추었고 나무로 얽어 만든 둥근 궁륭형(穹窿形) 지붕과 네 귀퉁이의 봉황조각, 난간의 용머리 장식, 가마의 몸체 전면에 표현된 연꽃, 국화, 화초 장식 등에서 보이는 조형미와 조각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 궁륭형(穹窿形): 활이나 무지개처럼 둥글게 굽은 형상

 

특히, 불연의 몸체 주렴(珠簾, 구슬 등을 꿰어서 만든 발)에 동경(銅鏡, 청동거울)을 매단 첫 사례로,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되는 동경이나 불화의 복장낭(腹藏囊) 앞에 매단 동경처럼 어둠을 밝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상징으로 추정된다.

 

보물 ‘울진 불영사 불연’은 조선 후기 불연 가운데 제작 당시의 온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고 제작배경을 상세히 담은 글씨가 남아있는 점, 공예기술 면에서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값어치가 충분하다.

 

보물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完州 松廣寺 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및 塑造十六羅漢像 一括)’은 1656년(효종 7년) 만들어진 불상으로, 당시 제작된 나한상 가운데 수량과 규모면에서 가장 큰 작품이다. 이 일군의 불상은 제작 당시 수조각승 무염(無染)의 통솔 아래 조각승들이 1∼4명씩 분담해 제작했다. 참여 조각승들은 무염ㆍ승일파(無染․勝一派), 현진ㆍ청헌파(玄眞․淸憲派), 수연파(守衍派) 등 역량이 뛰어났던 17세기 조각장들을 계승한 인물들이자 당시 불교계를 대표한 승려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그만큼 완주 송광사 나한전 불사의 중요성을 가늠케 한다.

 

 

 

완주 송광사 불상은 조각과 더불어 개금(改金, 불상(佛像)에 금칠을 다시 함)ㆍ개채(改彩, 불상에 채색을 다시 올림) 작업 등 조각승과 불화승 사이 협업 체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영역이 다른 화원들이 어떻게 협업관계를 구축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유행한 목조와 소조, 채색 기법을 두루 활용해 화려하며, 나한상의 표정과 몸동작에서 작가의 재치와 개성을 엿볼 수 있어 작품성도 뛰어나다.

 

따라서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은 송광사를 본산으로 활약했던 조각승들의 활동체계와 제작태도, 경향 등을 밝힐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보물 ‘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은 조선 중기 정치와 학문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모습을 그린 18세기 초상화로, 제천 황강영당(黃江影堂)에 300년 넘게 봉안되어와 그동안의 내력이 분명한 작품이다.

*송시열: 조선 후기 학자이자 정치가. 노론(老論)의 영수이자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해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음. 조선 시대 주자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예론(禮論)에도 밝았음. 송시열에 의하여 재정비된 조선성리학은 동료와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조선사회 지배이념으로 정착됨.

 

 

작품 상단에는 ‘우암 송선생 칠십사세 초상(尤庵宋先生 七十四歲 眞)’이라는 화제가 적혀 있어 송시열의 74살 때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 화면 오른쪽에는 송시열의 초상을 문인화가 김창업(金昌業)이 그렸음을 밝힌 김창협(金昌協)의 화상찬(畵像讚)이 적혀 있고 왼쪽에는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짓고 권상하의 제자 채지홍(蔡之洪, 1683∼1741)이 필사한 화상찬이 적혀 있음. 이를 통해 이 작품이 1680년 23살의 김창업이 74살의 송시열을 그린 초본(初本)을 참조해 후대에 그려진 사실을 알 수 있음

 

그림 속 송시열은 네모난 회색 사방건(四方巾, 귀퉁이가 네모난 직사각형 모자)을 쓰고 검은색으로 깃과 소맷부리의 가장자리를 두른 회색 심의(深衣, 유학자가 평상시 입는 옷)를 입은 채 두 손을 맞잡아 소매 속에 넣은 반신상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주름이 깊게 파인 이마와 눈가, 희끗희끗한 콧수염과 턱수염 등이 인상적이며, 이는 마치 정치와 학문에서 그의 굴곡진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아울러 희고 검은 긴 수염은 세밀하게 표현했지만, 눈썹은 검고 짙게 그렸고, 황갈색으로 주름과 음영을 표현한 얼굴의 상세한 묘사와 달리 옷은 짙은 먹 선 위주로 굵고 간략하게 묘사한 점 등 서로 대비되는 필선을 통해 송시열의 학자적 풍모와 기상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송시열 초상화는 후대에도 추앙이 지속되면서 30여 점의 많은 작품이 전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이 작품은 진재해(奏再奚, 1691∼1769) 등 당대 으뜸 초상화가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우수한 사례에 속한다. 유려하면서도 단정한 필선, 정교한 채색으로 뛰어난 예술성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국보 ‘송시열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견주어도 수준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작품이므로, 보물로 지정할 값어치가 충분하다.

 

 

한성훈 기자 sol119@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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