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서울도 빨개졌네요

2021.08.25 12:22:43

홀로 피처럼 진한 생명력을 떨치는 배롱나무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11]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며칠 전 광화문 교보문고 뒤편을 거닐다가 길가에 붉은 꽃들을 많이 달고 있는 나무 하나를 보았다. 아니 이 한여름에도 나무에 꽃이 피나? 자세히 보니 역시 그랬다. 배롱나무였다. 한동안 서울에서는 볼 엄두도 내지 못하던 배롱나무들이 길가 여기저기에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화무십일홍!​

 

우리가 가끔 입에 달고 사는 이 말은 열흘 붉을 꽃이 없다는 뜻의 옛 한문식 말이다. 주로 권력의 무상함을 의미할 때 쓰이지만 기본적으로는 꽃이란 것이 그렇게 오래 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깔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꽃이 바로 백일홍, 속칭 배롱나무꽃이다.

 

화무십일홍이요

열흘 붉을 꽃 없다지만

석 달 열흘 피워내어 그 이름 백일홍이라

뜨거운 뙤약볕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꽃봉오리 터지던 날

진분홍 주름치마 나풀거리며

살랑이는 바람결에 살포시

미끈한 속살 내비치는 한여름의 청순한 화신이여!

 

                                     ... 조선윤, <배롱나무꽃>

 

왜 나무 이름이 배롱나무인데 꽃은 백일홍이라고 하는가?

 

원래는 백일홍이 먼저 붙은 이름인데 이것을 읽다 보니 ‘배기롱’이 되고 다시 ‘배롱’으로 줄어들었단다. 이름이 한자에서 어느 틈에 순우리말 식으로 자연스레 변한 것인데 배롱나무는 원이름 그대로 백일이나 붉게 꽃피는 나무다. 오래 피는 것으로만 말한다면 겨울 동백꽃도 오래 피고 무궁화도 오래 피지만 백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왜 이 나무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작은 꽃들이 모여서 꽃다발을 이루고 있는 것이, 곁에서 보면 늘 빨간 꽃이 피어있는 것 같고 그것도 더워서 모든 꽃이 피기를 멈춘 한여름에도 계속 빨갛게 있으니까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 아닐까? 다른 꽃들은 개별적으로 피었다가 짐으로써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데 이 나무의 꽃은 뜨거운 태양을 무서워하지 않고 7월부터 9월 사이 한여름에 계속 꽃을 피우니, 그런 ‘백일이나 지지 않는 꽃’이란 대단한 이름을 홀로 얻은 것이라 보인다.

 

가지마다 고깔 모양의 꽃차례를 이루며 뭉쳐서 피어나는데, 콩알만 한 꽃봉오리에서 6~7장의 꽃받침이 갈라지며, 긴 꽃자루 끝에 6~7장의 화려한 프릴 모양으로 꽃잎이 피어나니, 정말로 꽃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 이 나무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사랑을 받은 것인데, 추위에 약해서 중부지방 이상으로 올라가면 자연상태에서는 겨울나기가 어려워 남쪽에서만 볼 수 있었는데 어느새 우리 기후가 온난한 겨울로 바뀌면서 성큼성큼 북상한 것이리라.​

 

滿樹如堆錦  뜰에 가득 꽃나무 비단 겹쳐 펼쳐진 듯

繁英次第紅  온갖 꽃들 붉은 망울 차례로 터뜨리네

京華稀見汝  서울에선 보기 드문 너의 고운 모습

偏憶在南中  남쪽 지방의 추억 자꾸만 떠오르네

 

                      ... <백일홍 운(百日紅韻)>, 계곡(谿谷) 장유(張維)

 

衆卉莫不花  온갖 초목들 모두 아름다운 꽃이 있지만

花無保全月  한 달 가는 꽃 없다는데

爾獨紅百日  너 홀로 백 일 동안 붉어

爲我留春色  나를 위해 봄빛을 남겨주누나

 

                     ... <백일홍(百日紅)>,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칠월에 몽우리가 지기 시작하지만, 본격적으로 가지마다 활짝 피는 것은 아무래도 8월이고 한창 더위를 지나고 있는 요즘이 이 꽃들에게 한 철이다.​

 

 

아시는가? 모든 붉은 꽃은 슬픈 전설이 있다는 걸? 이루지 못한 사랑을 뜻하기도 하고, 순결한 피를 상징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청년 아도니스를 사랑하게 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가 죽어가면서 흘린 피에서 한 송이 꽃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곧 아네모네다. 아폴론의 총애를 받았던 미소년 히아킨토스가 흘린 피에서는 히아신스가 피어났다.

 

경북 청송의 주왕산에 피는 수달래라는 붉은 꽃은 중국 당나라 때에는 임금이 되고자 했다가 실패하고 군사들에게 쫓겨 이곳까지 왔다가 적의 화살을 맞고 숨진 주도(朱鍍)라는 사람의 몸에서 흐른 피가 꽃으로 피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 페르시아에서는 나이팅게일 새가 하얀 장미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해 날개를 펴 품에 안으려다 흰 장미의 가시에 날개가 찔려 피가 흘렀는데, 그 피가 흰장미를 붉게 해서 붉은 장미가 태어났다고 한다.​

 

우리의 배롱나무에도 그런 슬픈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평화로운 어촌에 어느 날 목이 세 개 달린 이무기가 나타나 해마다 처녀 한 명씩을 제물로 받아 갔다. 그 어느 해에 멋지게 생긴 한 장사가 나타나서 제물로 뽑힌 처녀대신 그녀의 옷을 갈아입고 제단에 앉아 있다 이무기가 나타나자 칼로 이무기의 목 두 개를 베었다. 처녀는 기뻐하며 "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죽을 때까지 당신을 모시겠습니다." 하자 그 장사는 아직 이무기의 남아 있는 목 하나를 더 베어야 한다며, “내가 성공하면 흰 깃발을 달고, 내가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 것이다”라고 하면서 배를 타고 나갔다.

 

처녀는 백 일 동안 기도를 드렸는데, 마침내 백일 뒤 멀리 배가 오는 것을 보니 붉은 깃발이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낙담한 처녀는 그만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장사는 이무기를 죽이고 온 것이고, 이무기가 죽으면서 뿜은 붉은 피가 깃발에 묻어 빨갛게 되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달고 온 것이었다. 그 후 처녀의 무덤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이 꽃이 백일 동안 정성스레 기도드린 꽃, 백일홍이란다.

 

 

백일이라고 꼭 백일을 의미할까? 아마도 한없이 이어지는 긴 날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언제나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붉디붉은 꽃, 사랑을 대변하는 정열일 것이다.

 

비단 같은 꽃이 노을빛에 곱게 물들어

사람의 혼을 빼앗는 듯 피어있으니

품격이 으뜸이다.

 

                    .. 강희안, 《양화소록》 중에서

 

昨夕一花衰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今朝一花開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는 것을

相看一百日  서로 일백 일이나 바라보니

對爾好銜杯  너와 더불어 한잔하리라

 

                                  ... 성삼문, <백일홍>

 

젊을 때 배롱나무꽃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던 성삼문은 38살의 젊은 나이에 단종 복위사건을 주도하다 형장이 이슬로 사라짐으로써, 배롱나무의 꽃처럼 인생을 길고 화려하게 살지는 못했다. 비록 사육신으로서 충절의 상징으로 역사에 남았지만 붉은 피를 흘리며 숨졌다는 데서 성삼문의 전설이 배롱나무꽃에 삽입되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 본다. 그래서 배롱나무꽃의 꽃말이 “떠나간 친구를 그리워하다”인가? 꽃이 붉으면 붉을수록 비극적인 사연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밀양 표충사에는 한여름 이 꽃이 지천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활짝 핀 배롱나무가 좌우에서 맞이하고 본격적인 경내로 들어가는 수충루 계단 앞 좌우에서도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며 영각 입구에는 수백 년은 족히 됐을 아주 큰 배롱나무가 연륜을 뽐내고 있다.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역임한 효봉(曉峰) 큰스님이 말년을 보내고 입적하신 만일루 경내 담장 옆에도 한 그루 배롱나무꽃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끈다. 유난히 표충사에 배롱나무가 많은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서 이 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버리듯 스님들 또한 세속을 깨끗이 잊기를 바라는 뜻에서 절 경내에 백일홍나무를 많이 심은 때문이라고 한다.

 

대구시 지묘동에도 표충사라는 이름이 붙은 사당이 있는데, 고려를 세울 때 왕건을 대신해서 순절한 충절공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이 사당엔 4백 년이 넘은 배롱나무가 있다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신숭겸 장군은 왕건처럼 보이기 위해 변장을 했다가 적의 칼에 찔려 죽었고, 그때 입었던 피 묻은 옷과 그곳에 피를 흘렸던 곳의 흙을 모아서 단을 쌓은 곳이어서, 이곳에 나중에 표충사로 만들면서 심은 배롱나무라는데, 여기에도 피를 흘린 전설이 남아있다.

 

 

배롱나무로 또 유명한 곳은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이다. 서원을 들어서자마자 대하게 되는 만대루(晩對樓)로 오르는 길 옆과 그 앞, 그리고 사당인 존덕사 앞 등 서원 주변을 돌아가며 72그루의 배롱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여기에도 수령 400년이 된 배롱나무가 2008년 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높이가 8미터를 넘는다.

 

왜 이 병산서원에 유독 배롱나무들이 많을까? 병산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류성룡(柳成龍)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써 1614년경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를 건립하면서 후손 류진(柳袗)이 배롱나무를 많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성룡의 후손들은 선조대왕이 유성룡의 재주와 공로를 인정하고 그에게 내린 특별한 은혜를 존덕사 주위에 심은 배롱나무 꽃으로 상징하고 싶었을 것이다. 줄기 표면에 껍질이 없는 맑고 투명한 배롱나무의 곧게 올라가는 자태가 곧 물욕에 빠지지 않는 선비들의 몸가짐을 의미한다고 해서 이 병산서원만이 아니라 전국의 다른 서원에도 이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다.

 

 

요즘 남쪽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길가 곳곳에서 선홍, 진홍을 터트리며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배롱나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최근 배롱나무는 가로수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우리네 정원에 수많은 화목이 심어지고 길러지며 다 자신이 가진 덕목을 자랑하지만, 겨우내 허연 속살을 드러내며 앙상한 가지만을 보여주는 배롱나무들은 한여름 모든 수목이 더위에 지쳐 꽃을 피우지 못하고 헐떡이고 있을 때 홀로 계속 피처럼 진한 생명력을 떨친다는 데서 배롱나무꽃은 여름을 대표하는, 여름을 이기는 꽃(夏勝花)으로서 결함이 없다.​

 

좋은 나무는 곧 그들의 기운과 덕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우리가 꽃이나 나무를 보며 단순히 보는(看) 데 그치지 않고 그 깊은 뜻까지를 아는(觀)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옛사람들이 꽃나무를 애써 길러 우리들의 삶을 이끌었듯이 오늘날의 사람들도 꼭 그것이 오래되어서만이 아니라 바로 그런 좋은 덕성을 가르쳐주는 것이기에, 이런 나무들을 사람들이 보고 조금이라도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으면 좋겠다. 코로나인가 뭔가로 멀리 여행을 가기 어려워진 요즈음, 이제는 서울 근처에서도 자주 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말이다.

 

 

이동식 인문탐험가 ld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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