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경각 이루고, 측우기 발명한 장영실과의 결별

2021.11.11 11:42:36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1] 장영실(蔣英實) ②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 세종 때 과학자로 널리 알려진 장영실(1390년경~?)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든 인물이다.

 

세종은 ‘임현사능’ 곧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부리시어 널리 문·무를 겸하여 걷어 들이시는 길을 열었다.”(任賢使能, 廣開兼收之路。)(《세종실록》 14/4/28) 이에 따라 장영실은 세종 5년 관노에서 벗어나 상의원 별좌 자리를 받게 되었다. 이후 세종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여러 기구를 만들었는데 천문기구는 자격루, 혼천의, 혼상,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간의대 등이고 이를 종합해 세종 20년에 흠경각을 세운다.

 

흠경각 이루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지은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며,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임금이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예전을 돌아보건대, 임금이 정사를 하고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서 세상에 절후를 알려줘야 하는 것이니, 이 절후를 알려주는 중요한 방법은 천기를 보고 기후를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기형 (璣衡)과 의표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옛일을 되돌아보고 경험하는 방법이어야 하는데 이는 지극히 정밀하여 한 기구, 한 형상만으로는 능히 바르게 할 수 없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이 일을 맡은 이에게 명하여 모든 의기(儀器)를 제정하게 하였는데, 대소간의(大小簡儀)ㆍ혼의(渾儀)ㆍ혼상(渾象)ㆍ앙부일구(仰釜日晷)ㆍ일성정시(日星定時)ㆍ규표(圭表)ㆍ금루(禁漏) 같은 기구가 모두 지극히 정교하여 전일 제도보다 훨씬 뛰어나 오직 제도가 정밀하지 못하고, 또 모든 기구를 후원(後苑)에다 설치하였으므로 시간마다 점검하기가 어려울까 염려하여, 이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 한 간 집을 세웠도다. (《세종실록》 20/1/7)

 

측우기

 

세종 후기 23년에는 측우기도 만들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왕세자 이향(李珦, 훗날의 문종 임금)이 우량을 측정하는 정확한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그릇에 빗물을 받아 그 양을 재는 방식을 시험하고 있었다. 땅이 빗물에 스민 깊이는 토양의 습도에 따라 달라지므로 이 방법으로는 빗물의 양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까닭이었다.

 

 

이 연구의 결과가 그해 8월 호조(戶曹)에 의해 보고되었고, 이후 그릇의 규격 등에 관한 몇 가지 수정을 거쳐 이듬해 세종 24년(1442) 측우기를 이용한 전국적인 우량 관측과 보고 제도가 확정되었다. ‘측우기’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도 이때부터다.

 

사람들은 비의 양을 기록하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비의 양을 재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근거로 그 지역 농사의 풍흉(豊凶)의 근거를 알 수 있고 이는 바로 공정한 세금과 연결될 수 있는 준거가 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활자 경자자

 

일찍이 세종 2년(1420)에 주자소에서 동활자로 경자자를 만들었다. 조선 최초의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단점을 보완하여 1420년 경자년에 만든 두 번째 동활자이다. 계미자의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또 주조가 거칠어 인쇄하는 도중 활자동요가 자주 생겨 능률이 오르지 않으므로 세종이 다시 고쳐 주조하게 한 것이다.

 

이에 조선의 주자기술은 2단계의 개량을 보았다. 활자주조는 세종의 지휘 아래 이천(李蕆)과 남급(南汲)이 담당하고 김익정(金益精)과 정초(鄭招)가 감독업무를 관장하였다.

 

지난(2021) 6월 조선 한양도성의 중심부였던 서울 도심 인사동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을 포함해 세종대왕 시대의 천문 시계 등 다양한 금속유물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세종~중종 때 제작된 물시계의 부속품인 주전(籌箭),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점, 중종~선조 때 만들어진 총통(銃筒)류 8점, 동종(銅鐘) 1점 등의 금속 유물이 한꺼번에 같이 묻혀있는 형태로 발굴됐다고 밝혔다.

 

 

발견된 금속활자는 특히,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에 한정되어 사용되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점, 한글 금속활자를 구성하던 다양한 크기의 활자가 모두 출토된 점 등도 첫 사례로 꼽히고 있다.

 

조선시대 활자에 대해서 뒷날 《정조실록》에 기사가 나온다.

 

“태종(太宗) 계미년에 경연(經筵)에 있던 《시경》ㆍ《서경》ㆍ《좌전》의 고주본(古註本)을 바탕으로 이직(李稷) 등에게 명하여 10만 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이 계미자(癸未字)다. 세종(世宗) 경자년013)에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개주(改鑄)하였는데 이것이 경자자(庚子字)고, 갑인년에 경자자의 글자가 잘고 촘촘하다는 까닭으로 김돈(金墩) 등에게 명하여 20여만 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이 갑인자(甲寅字)다.” (《정조실록》 18/1/24)

 

이때 장영실은 구텐베르크보다 이른 1434년 주자소 기술자들과 함께 갑인자(甲寅字)라는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세종과의 결별

 

장영실에게 마침내 결별의 시간이 온다.

 

대호군 장영실에게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수레)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24/3/16) 이에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었고, 그 뒤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임금이 장영실에게는 두 등급을 감형(減刑)하였다.

 

가사ㆍ가요ㆍ무용의 한마당

 

장영실이 50살이 넘어간다. 아직 일할 수 있었겠으나, 더는 기술은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보다는 세종이 다른 일, 예를 들면 훈민정음 창제 등에 몰입하게 되어 다른 곳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모자랐을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 필자의 추론이지만 더는 장영실을 이용하려면 먼저 정승들의 반대 의견을 누를 수 있어야 하고, 일할 과제와 명분을 찾아주어야 하는 지속적인 관심과 열정이 필요한데 이때 세종에게는 나머지 생애의 과업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 훈민정음의 완성과 이를 반포케 하는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등 여러 출간물, 그리고 이를 신악과 <여민락> 등 춤으로 표현해내려는 후속 작업들이 머릿속에 차 있었을 것이다.

 

〈용비어천가〉,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등을 공사간 연향에 모두 통용케 하다

 

의정부에서 "시나 노래를 제작하는 것은 온 나라의 사람들로 하여금 노래하고 읊조리고 소리치고 외어서 그립고 사모하는 마음이 일게 하여야 하옵나니, ... 이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내리신 것은 조종(祖宗)의 융성한 덕과 거룩한 공을 노래하고 읊게 하려고 지으신 것이오니, 종묘에서 쓰는 데만 그치게 할 것이 아니라, 여민락(與民樂)ㆍ치화평(致和平)ㆍ취풍형(醉豐亨) 등의 음악을 공사 간의 잔치에 모두 통용하도록 허락하시되, 조참(한 달에 네 번 백관이 정전에 모여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政事)를 아뢰던 일)과 표문(表文, 임금에게 표로 올리던 글)이나 전문(箋文, 길흉사가 있을 때 임금이나 왕후ㆍ태자에게 아뢰던 글)을 배송하는 날 궁궐 밖을 나가실 때는 여민락만(與民樂縵)을, 조참하는 날 환궁하실 때와 표문이나 전문을 배송하거나 조칙(詔勅)을 맞으러 행차하실 때는 여민락령(與民樂令)으로 하되, 모두 황종궁(黃鐘宮)을 쓰게 하시고, 계조당(繼照堂)에 조참하는 날 자리에 오르실 때는 여민락만(與民樂縵)을, 궁궐 안으로 돌아오실 때는 여민락령(與民樂令)에 모두 고선궁(姑洗宮)을 쓰도록 일정한 제도가 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29/6/5)

 

세종은 훈민정음을 이용한 우리 가사와 가요 그리고 춤까지 어우러지는 조선 초 시와 노래와 무용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국보 제331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복원 모습(왼쪽), 측우대 글씨 탁본(국립고궁박물관)

〈한글 금속활자〉, 대자(大字), 가로 1.5cm, 세로 1.2cm, 높이 0.7cm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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