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판중추원사 이천(李蕆)에게 궤장을 내리다

2021.12.09 11:14:42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2] 이천(李蓚) - ②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이천(李蕆, 1376∼1451))은 세종시대가 낳은 과학자의 한 사람인데 《조선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주요 실적을 확인해 보자. 

 

  세종 3년, 구리판 : 구리판을 다시 잘 주조한 주자소에 술 120병을 내려 주다. (《세종실록》 3/3/24)

  세종 10년, 성터 살핌: 공조 참판 이천을 함길도 경원 등지에 보내어 성터를 살펴 정하게 하다. (《세종실록》 10/7/21)

  세종 13년, 쇠고리 제작: 근정전 등에 화재시 사용할 쇠고리를 만들게 하다.

    "근정전(勤政殿)이 높아서 만일 화재가 있다면 쇠고리를 연쇄(連鎖)하여 처마 아래로 늘여 놓았다가, 화재가 있으면 이를 잡고 오르내리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 근정전·경회루·사정전· 인정전 등에 사용할 쇠고리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세종실록》 13/1/2)

  세종13년: 이천으로 하여금 노궁(弩弓)의 제도를 살펴보고 만들게 하다. (《세종실록》 13/5//17)

 

  세종 14년: 지중추원사 이천이 선척을 견고하게 만드는 방법을 힘써 진언하다. (《세종실록》 1412/18)

  세종 16년: 지중추원사 이천에게 주자(鑄字)를 만들어 책을 박도록 하다. 지중추원사 이천(李 蕆)을 불러 의논하기를, 경이 지혜를 써서 판(板)을 만들고 주자 (鑄字)를 부어 만들어서,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비록 밀을 쓰지 아니  하고 많이 박아 내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주자 (鑄字) 20여 만 자(字)를 만들어, 이것으로 하루의 박은 바가 40여 장[紙]에 이르 니, 자체(字體)가 깨끗하고 바르며, 일하기의 쉬움이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었다. (《세종실록》 16/7/2)

  세종 19년: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야인 토벌의 세 가지 계책을 올리다. (《세종실록》 19/6/11)

 

  세종19년: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의 상언대로 새로이 완구(碗口,화포)를 만들게 하 다.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李蕆)이 상언하기를, "대완구가 너무 무거워서 싣 고 부리기에 어려워서 실제로 쓸모가 없고, 오직 중완구)가 성을 공격하는 데 편리하지만, 소에게 실을 수 없으며, 소완구(小碗口)는 너무 작은 것 같습니 다. 만약에 중완구와 소완구의 중간 정도쯤 되게 다시 만든다면 말에 싣는 데 편리할 것입니다. (《세종실록》 19/7/27)

 

  세종 24년: 진양대군 이유 등에게 헌릉의 수보할 곳과 수릉의 땅을 살피게 하다. (《세종실록》 24/5/25)

  세종 27년 : 강에서 수전을 연습하라고 명령하다.

    지중추원사 이천(李蕆) 등이 삼군(三軍)으로 거느리되, 한 군선(軍船)마다 사졸 30여 인씩 싣고, 또 배 4척으로 허수아비 사람[芻人]을 태워 적군을 삼아 가지고 상거(相 距) 20보(步)쯤에서 각(角)을 불고 북을 울리면서 주화·질려포(走火蒺藜砲)를 쏘면서 전투하는 모양을 하는데, 세자가 대군과 함께 희우정(喜雨亭) 서쪽 산봉우리에 나가 서 구경하였다. (《세종실록》 27/3/2)

 

  세종 27년: 화포 제도를 새롭게 할 것을 의정부에 전지하다. (《세종실록》 27/3/30)

  문종 즉위년 : 판중추원사 이천(李蕆)에게 궤장(几杖)을 주었다. 궤장(几杖) 임금이 나라에 공 로가 있는 70세 이상의 원로 대신(大臣)에게 내려주던 안석[几]과 검은 지팡이[烏杖]. (《문종실록》 즉위년 8/19)

   이 가운데 지난 연재에서는 무인(武人) 과학자, 계미자(癸未字에) 이은 갑인자(甲寅字), 갑조법(甲造法)에 대해 설명했다.

 

 

도량형 표준화 사업

 

이천은 이어 도량형의 표준화 사업에 착수했다. 세종 4년(1422)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임금이 공청이나 사가에서 사용하는 저울이 정확하지 아니하므로, 공조참판 이천에게 명하여 개조하게 했다. 이 날에 이르러 1,500개를 만들어 올렸는데, 자못 정확하게 되었으므로 전국에 반포하고, 또 더 만들어져 백성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사들이게 했다.” (《세종실록》 4/6/20)

 

도량형의 표준 작업은 그 후 자(尺)와 되, 말의 정비로 이어져 조선왕조의 도량형 제도 확립에 기초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에서는 한 잔(盞), 한 작(爵), 한 대야[鐥,선], 한 병(甁), 한 동이[東海]로 계량했는데 근래까지 이 양이 얼마를 의미하는 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세종 때에 편찬된 전순의의 『산가요록(山家要錄)』이 2001년에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 각 량의 크기가 설명되어 있었다. 『산가요록』에서는 두 홉[合,합]이 한 잔(盞)이 되고 두 잔이 한 작(爵)이 되고, 두 되[升]가 한 대야[鐥]가 되고 세 대야가 한 병(甁)이 되고 다섯 대야가 한 동이[東海]가 된다고 기록했다. 이로 미루어 한 동이는 한 말[一斗,일두]과 같은 분량이고, 한 병(甁)은 6되(升,승)가 될 수 있어 막연히 알려진 동이, 대야, 병의 계량 단위가 밝혀진 것이다. 전순의는 세종부터 성종까지의 의관이다.

 

갑인자 (甲寅字)

 

조선조에서 활자로 계미자(태종 3, 1403)는 고려의 활자기술을 그대로 받은 것이고, 세종조에 이르러 경자자로 개량했다. 그리고 이천을 보다 유명하게 만든 것은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갑인자(甲寅字)를 세종 16년(1434)에 개발했기 때문이다. 20여만 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갑인자는 대나무로 조판하여 빈 데를 완전히 메우는 조립식을 채택했고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었다.

 

갑인자는 대나무로 조판해 빈 데를 완전히 메우는 조립식을 채택했고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으며 먹물도 진하고 잘 묻게 만들어 한결 까맣고 윤이 나도록 했으며 하루에 40여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또한 이때 처음으로 한글 활자를 주조하여 병용했으며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갑인자는 이천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기술자들을 총동원하여 이루어 낸 결실이다.

 

조선시대에 인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행한 라틴어 성경과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성경은 총 1천2백 페이지였다. 그런데 이보다 20년 앞서 조선은 갑인자로 『자치통감강목』 5∼6백 부를 인쇄했다. 이 책의 한 권은 70여 쪽으로 1부가 294권이므로 모두 합하면 2만2천여 쪽이 된다. 이것을 5∼6백 부나 인쇄했으니 5백 부로 계산하여도 총 1천100여 쪽이 넘는다. 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본에 비해 1만 배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다.

 

이 시대에 활자의 개량이 완성 단계에 들어가 이후 조선조 후기까지 300여년 간 이어간다. 정조 시 (정조 20년, 1796년 전후로) 다시 활자 개량이 이루어진다. (참조 : kisti의 과학향기 등)

 (다음 호에 이천 -③ 계속)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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