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부심술가, 상주아리랑이 어우러진 답사길

2022.03.24 12:05:08

평창강 따라 걷기 11-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낮 12시 45분에 일행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발하였다. 이날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서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신선했다. 걷기에 알맞은 좋은 날씨였다. 일행 가운데 70이 안 되는 젊은 여성이 둘이나 끼게 되자, 70을 넘은 중년 남성들은 모두 기분이 좋은 표정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음양이 섞여야 조화가 이루어지나 보다. 이전 답사와 달리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대화도 딱딱하지 않은 주제로 이루어진다.

 

지구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태양을 돌고 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9월 23일)이 지나자 평창강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정확하기만 하다. 산에 있는 나무들은 아직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길가에 보이는 들풀들은 어느새 잎이 시들면서 말라가고 있다. 밭에 있는 곡식들과 열매를 맺는 나무들은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이날 내가 본 농작물로서는 벼, 수수, 율무, 무, 파, 호박, 고추, 배추, 해바라기 그리고 대추였다.

 

출발하자마자 작은 언덕을 넘어 내려가는데 왼편 길가에 대추나무가 있었다. 잘 익은 대추가 손 닿는 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내가 대추를 하나 따서 먹어보니 약간 달짝지근하면서 맛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대추를 따 먹었다. 길을 가다가 대추를 따 먹는 체험은 오랜만이어서 모두 즐거워했다.

 

 

마을 끝나는 지점에 표시석이 서 있다. 우리가 지나는 마을이 후탄리이다.

 

 

후탄1리는 일골마을과 뱃두둑마을을 포함하나보다. 후탄(後灘)이라는 이름은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용하리 일부와 광탄리 일부를 병합한 뒤 후평(後坪)과 광탄(廣灘)에서 한 자씩을 취하여 후탄리라 하였다고 한다. 곧이어 나타나는 일골교를 지나 오르막길을 서서히 올라갔다. 고개는 높지 않고 이름도 없었다. 카카오맵에도 고개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무명 고개를 넘어가자 오른쪽에 작은 저수지가 나타났다. 아마도 유료낚시터로 이용하다가 방치된 듯 좌대들이 흩어져 있었다. 지도를 보니 쌍용낚시터라고 표기되어 있다. 조금 더 내려가자 삼거리가 나타났다. 삼거리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커다란 공장이 서 있다. 지도상에는 ‘쌍용C&E’라고 표시되어 있다. 시멘트를 만드는 쌍용양회 영월 공장이 여기다.

 

 

시멘트는 건물이나 아파트, 댐, 교량을 지을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핵심 재료로서 ‘건설의 쌀’이라고도 부른다. 김성곤(1913~1975) 회장이 일으킨 쌍용양회 회사는 1962년에 시멘트 공장을 시작한 뒤에 단 한 번도 업계 1등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는 시멘트업계의 맏형 격이다.

 

한국은 세계 10대 시멘트 생산국인데 쌍용양회가 수출 물량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쌍용양회는 동해 북평 영월 광양 등 4곳에 공장을 가지고 있는데, 동해 공장은 세계 가장 큰 규모다. 쌍용이라는 회사 이름은 영월 공장이 있는 한반도면 쌍용리의 지명에서 따왔다. 쌍용그룹은 쌍용양회 외에도 자동차, 건설, 정유, 중공업 등 계열사를 늘려서 한때는 재계 5위까지 올랐다.

 

김성곤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정치에 투신하여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김성곤 회장은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고서 잘 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김성곤 회장은 1971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거역하고 국회에서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마자 그는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턱수염을 뽑히는 수모까지 당하였다. 김성곤 회장은 고문 후유증으로 1975년에 죽고, 아들인 김석원이 그룹을 승계하였다. 그러나 쌍용그룹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1998년에 해체되었다. 계열사는 각각 팔려나갔다.

 

쌍용양회는 2016년부터 국내 사모펀드인 한앤컴퍼니가 운영하고 있는데, 2021년 3월에 회사 이름을 쌍용C&E로 바꾸었다. 새 이름에서 C는 Cement를 뜻하고 E는 Environment(환경)를 뜻한다. 홍사승 쌍용C&E 회장은 “시멘트는 국가 기간산업이지만 정체산업이기도 하다”라며 “시멘트만으로 성장을 지속하기는 어려우므로 종합환경기업으로 변신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쌍용리 지명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상리(龍上里)와 용하리(龍下里) 일부를 합하여 쌍용리(雙龍里)라고 하였다. 쌍용양회 원석광이 개발되기 전 뒷산에 올라가 보면 쌍용리의 지세는 마치 용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형상이었다고 한다. 영월의 풍부한 시멘트와 석탄을 실어 날랐던 쌍용역은 중앙선 제천에서 영월 사이에 있다.

 

쌍용양회 공장이 바라보이는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나아갔다. 조금 가니 다시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이번에도 왼쪽 길로 나아갔다. 길 오른쪽으로는 쌍용천이 흐른다. 작은 시멘트 공장이 왼쪽 길가에 나타났다. 공장 앞에 어떤 남자가 서 있어서 공장 이름을 물어보니 들은 체도 않는다. 낯선 사람에게는 정보를 알려주지 말라는 명이라도 받았나? 공장 이름 정도는 큰 비밀이 아닐 텐데... 카카오맵으로 확인해 보니 공장은 태봉광업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태봉광업 공장을 조금 지나자 오른쪽으로 커다란 미루나무 3그루가 그늘을 만들었다. 나머지 일행은 앞서 가버렸고, 석주와 시인마뇽 그리고 나는 미루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미루나무 뒤로는 쌍용천이 흐른다.

 

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니 전형적인 산골 풍경이 나타난다. 산에는 나무가 가득하고, 계곡에는 작은 밭에서 농작물이 자라고 있다. 길은 있으나 차는 보이지 않는다. 담이 없는 시골집이 한두 채 띄엄띄엄 나타난다. 산골 길을 걸으면 왠지 편안한 느낌이 든다. 서울 시내에서 걸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서울 길은 차 소리가 시끄럽고 사람들이 많아서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고층 건물이 구름을 가린다. 하늘은 미세먼지와 자동차 매연 탓에 항상 흐리다. 아파트는 성냥갑을 쌓아놓은 것 같다. 가로수가 심겨 있지만, 공기는 탁하기만 하다. 직장 때문에 교육 때문에 할 수 없이 서울에 살았더라도, 은퇴한 뒤에는 서울을 떠나 시골에 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후탄리는 북쪽 경계면에 서강이 흐르고 있다. 낮 2시 20분에 후탄1리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해당은 사진동호회원과 함께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럴듯한 정자가 하나 있었다. 이제 답사팀은 11명으로 늘어났다. 우리는 정자에 앉아서 간식을 먹었다. 내가 가져온 군고구마, 가양이 가져온 삶은 밤, 그리고 누군가 내어놓은 호두과자, 사과, 복숭아 등등 매우 풍성한 간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푸른 산과 파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정담을 나누었다.

 

누군가가 해당에게 판소리를 청했다. 해당은 짐짓 사양하였다. 내가 배낭에서 부채를 꺼내어 손에 쥐여주자 해당은 판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해당은 흥보가 중에서 ‘놀부심술가’와 ‘돈타령’을 구성지게 하였다.

 

 

해당이 나보고도 판소리를 청했다. 해당의 목소리는 텁텁한 막걸리 같아서 판소리에 잘 어울린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맑아서 판소리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판소리 대신 민요인 상주아리랑을 불렀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후반부는 생략하고 중간까지만 불렀다. 잘 부르지도 못하는데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서였다.

 

청중 가운데 상주가 고향인 사람이 있었는데, 상주아리랑에 관해서 물었다. 상주 아리랑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슬픈 가락의 아리랑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상주 지방은 경북 내륙의 험준한 산골로서 주민들은 가난하였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북간도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다. 이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부른 노래가 상주아리랑이다. 상주아리랑은 곡은 사라지고 사설만 남아있었는데, 만정(晩汀) 김소희(1917~1995) 명창이 작창을 하여 현재의 상주아리랑을 만들었다.


 

 

우리 일행은 기념촬영을 하고 2시 45분에 길을 떠났다.

 

쌍용천을 따라 산길을 계속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묻는다. 언제 평창강을 보게 되느냐고? 좋은 질문이다. 이 구간의 평창강은 강둑 따라 길이 나 있지 않다. 그래서 강에 가장 가까운 길을 따라가는데, 고개 하나를 더 넘어야 비로소 평창강을 볼 수 있다.
 

 

조금 가다 보니 후탄1리 종점이라고 쓰인 버스 정류장이 나타났다. 버스가 여기까지 들어왔다가 다시 돌아나가는 지점인가 보다. 더는 버스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니 두메 가운데 두메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두메에도 포장된 2차선 도로가 잘 나 있다. ‘섬진강 따라 걷기’를 얼마 전에 마친 시인마뇽의 말에 의하면, 아무리 두메라도 버스 정류장에 표시된 시간표대로 정확히 버스가 운행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에 들어선 것임이 틀림없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사물놀이, BTS, 블랙핑크,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 게임 등 이른바 한류(韓流)가 지구촌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일찍이 기원했듯이 대한민국은 군사대국이나 경제대국이 아니고 문화강국을 향해 잘 나아가고 있다.

 

(계속)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muusim22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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