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울리는 해원의 몸짓, 곱사춤 공옥진

2022.04.11 12:42:46

《춤은 몸으로 추는 게 아니랑께 – 광대 공옥진》, 백승남, 우리교육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병신춤이라 부르지 마시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

장애자들

내 동생

어린 곱사 조카딸의 혼이

나에게 달라붙어요.

오장 육부가 흔들어 대는 대로

나오는 춤을 추요.”

(p.14)

 

광대 공옥진이 춘다. 오장 육부를 뒤흔들며 춘다. 이른바 ‘병신춤’이다. ‘병신’이라는 말에 내포된 부정적 어감을 지우기 위해 ‘곱사춤’으로도 불리는 이 춤은, 신체가 부자유스러운 이들의 한과 눈물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한판 굿에 가깝다.

 

한 시대를 풍미한 판소리 명창, 1인 창무극의 대가, 곱사춤 명인 공옥진은 아이돌 그룹 투애니원의 단원 공민지의 고모할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공민지 또한 집안에 면면히 흐르는 ‘예인의 피’를 입증하듯, 수많은 아이돌 그룹 가운데서도 예사롭지 않은 춤 실력으로 이름을 날렸다.

 

지은이는 이 책 《춤은 몸으로 추는 게 아니랑께 – 광대 공옥진》을 통해 명인 공옥진이 한평생 걸었던 예인의 길, 그녀가 남기고 떠난 소중한 유산을 딸에게 들려주는 듯한 친근한 어조로 풀어낸다. ‘우리 인물 이야기’ 시리즈의 일곱 번째 이야기로 나온 이 책을 읽다 보면 ‘공옥진’이라는 한 인간이 일궈낸 아름다운 유산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공옥진은 전남 영광에서 소리꾼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남도에서 손꼽히는 명창이던 할아버지 공창식, 전라남도 인간문화재 제1호가 된 아버지 공대일 또한 소리꾼이었다. 소리와 같은 기예를 천시했던 사회 풍조 탓에 옥진의 부모는 소리를 가르치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의 관심은 언제나 소리였다. 소리를 향한 타고난 재능과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옥진의 아버지가 징용을 당해 일본으로 끌려갈 위기에 처했다. 뇌물을 쓰면 징용에서 빠질 수 있었기에 옥진의 아버지는 그녀를 유명한 여류무용가였던 최승희의 일본 집에 잔심부름해주는 아이로 보내고 위기를 모면했다.

 

일본 최승희으로 집으로 갔던 옥진은 전쟁 막바지, 미국의 도쿄 공습으로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하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간신히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유리걸식하며 집을 찾아가고, 마침내 가족들과 만났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비로소 소리꾼이 되기를 원하는 옥진의 바람을 들어주고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확실히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그녀의 소리는 일취월장해 군산, 정읍, 고창에서 열린 명창 대회에서 잇달아 장원을 차지했다.

 

그때 명창 대회에서 그녀를 보고 반한 ‘김준희’라는 경찰과 혼인도 했지만, 혼인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터져 갓난아기와 함께 허겁지겁 피난길에 올랐다. 한때 경찰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유언처럼 소리를 뽑자 재주를 아깝게 여긴 인민군이 그녀를 살려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쟁은 끝났지만 뒤이은 남편의 불륜으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집을 나와 국수 장사를 하고 있던 그녀를 임방울 선생이 창극의 세계로 이끈다. 그 뒤 ‘임방울 창극단’, ‘김연수 우리 국악단’, ‘박녹주 국극 협회’ 등을 거치며 10년 남짓 배우 생활을 했다.

 

 

그러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강한 허무를 느끼고 지리산 자락에 있는 천은사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기도 했다. 몇 년간 절에서 보내다 아버지의 완강한 뜻으로 다시 속세로 돌아와, 자신이 돌아갈 곳은 역시 무대라는 생각에 다시 배우 생활에 전념한다.

 

그녀의 대표적인 춤이라 할 수 있는 ‘곱사춤’이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벙어리 남동생과 곱사등이 조카딸을 둔 그녀는 단순한 흉내를 넘어, 춤을 출 때만큼은 자신이 곱사가 되어 부자유스러운 신체로 겪은 한과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곤 했다.

 

(p.163)

나는 지금도 춤판에만 서면 몸 아픈 사람, 마음 아픈 사람, 구천을 떠도는 슬픈 원혼들까지 뿌옇게 달려드는 것만 같단다. 내 남동생, 내 조카딸도 있고, 팔 없는 사람, 다리 없는 사람, 꼽추, 앉은뱅이, 장님, 문둥이들까지 한을 서리서리 품고 죽은 모습들이 다 내게 하소연하는 것만 같아. 내 설움을 좀 이야기해 달라고. 내 한을 좀 풀어달라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춤을 춘단다. 이승에서 풀지 못한 그네들의 한을 내 가슴속으로, 내 뼈마디 속으로 받아들여 나라도 대신 풀어주고 싶어서, 그들의 눈물을 내 손으로 닦아주고 싶어서, 신명나게 춤을 춘단다.

 

 

 

그런 그녀의 춤에 함께 빠져들며 공감하는 관객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장애인을 희화화시킨다는 비난도 많았다. 특히 ‘병신춤’이라는 이름 자체가 ‘병신’으로 손가락질받은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지적이 있었다.

 

비록 그녀의 의도와는 완전히 달랐지만, 공옥진은 자신의 춤이 그렇게 보일 수 있음을 깊이 수용하여 ‘병신춤’이라는 이름을 못 쓰게 했고, 이름이 필요하면 춤 내용에 맞추어 ‘봉사춤’, ‘곱사춤’ 등으로 바꾸어 불렀다. 더불어 그 춤은 창무극 속에 넣어 살짝살짝 보여줄 때 말고는 잘 추지 않았다.

 

그래도 그 춤은 공옥진의 대표적인 춤이 됐다. 예쁘고 화려한 춤은 아니었지만, 그 어떤 춤보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로 고통받고 멸시에 고통받은 사람들의 설움을 달래는 그녀의 몸짓에는 해원(解寃)의 미학이 녹아 있었다.

 

 

 

(p.128)

눈물은 웃음으로 끝맺고, 다시 웃음은 눈물로 잇고. 그렇게 되풀이하면 웃음과 눈물의 감정이 서로 섞이거나 극복된단다. 슬픔이나 서러움, 한의 눈물을 그렇게 ‘신명’으로 푸는 거야. 몇 번 되풀이를 겪으면 결국엔 마음이 가벼워지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삶을 대하게 되지.

 

눈물과 웃음은 맞닿아 있다. 눈물의 끝에는 웃음이 있고, 웃음의 끝에는 눈물이 있다. 그 둘은 서로 섞이고 순환하며 삶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한평생 한을 신명으로 풀어내며 수많은 이들을 위로한 공옥진은 2012년 8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사람을 웃고 울리는 건 대단한 일이다. 공옥진은 그 둘을 한꺼번에 해낸 예인이었다. 울음 속에 웃음이 있고, 웃음 속에 울음이 있다는 삶의 진실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수많은 사람을 위로한 진정한 예인, 공옥진. 그녀가 남긴 아름다운 유산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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