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되지 못한 왕자들

2023.01.02 11:40:40

《비운의 조선 프린스》, 이준호, 역사의 아침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임금이 승하한 뒤, 첫째 아들인 왕세자가 즉위한다.’

얼핏 보아 당연한 듯 보이는 이 명제는 실현되지 못한 적이 훨씬 많았다. 조선 역사에서 임금이 승하한 뒤,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왕세자는 겨우 일곱 명에 불과했다. 조선왕조 스물일곱 명의 임금 가운데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만 적자이자 장자로 왕위를 계승했으며 그나마 요절하지 않고 꽤 오랜 기간 정사를 제대로 펼친 임금은 현종과 숙종뿐이었다.

 

웬만한 기업에서도 ‘가업 승계’와 ‘후계자 양성’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한 나라를 물려줘야 하는 봉건시대에 ‘왕세자 책봉’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자 출신 왕자들만 많거나, 서자 출신 왕자조차 거의 없거나, 적자 왕자는 있으나 군주가 지녀야 할 자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등 왕통을 잇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전문 역사 연구자의 길을 걸은 지은이 이준호는 임금이 되지 못한 왕자들의 비극적인 인생을 한 권의 책, 《비운의 조선 프린스》에 담았다. 물론 임금이 되지 못한 왕세자 가운데서도 천수를 누리며 잘 살다 간 이가 더러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럴 뿐 언제 역모에 휘말릴지 모를 살얼음판 같은 인생이었다.

 

 

지은이는 세상 사람들 생각에 왕자는 ‘구름 위에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알고 보면 일반 사람들과 매한가지로 희로애락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에 얽힌 비극적인 사연도 그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보면 충분히 ‘그럴 만한’ 까닭과 과정이 있었고, 이를 따라가다 보면 좀 더 피부에 와닿는 역사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책에 소개된 왕자들의 면면도 다채롭다. 비운의 임금 정종의 맏아들 불노, 태종의 적장자이자 개국 초기 왕업을 수성할 왕세자로 기대를 모았으나 결국 기대를 저버린 양녕대군, 왕위 계승 서열 1ㆍ2위였으나 왕위를 양보하고 평생 숨죽여 살아야 했던 제안대군과 월산대군, 선조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영창대군, 인조의 적장자이나 부친의 견제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소현세자 등 조선왕실을 수놓은 왕자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양녕대군처럼 어쩌다 보니 아버지가 임금이 되어서, 본인의 적성과 희망과는 무관하게 왕세자라는 무거운 자리를 강요당하며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왕자도 있었다. 사실 조선의 왕자들 모두 한 번쯤은 차라리 민가의 이름 없는 집 아들로 태어났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그만큼 임금의 아들로 태어난 삶은 누리는 것도 많은 대신, 언제 역모에 이름이 올라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화려하지만 위태로운’ 삶 그 자체였다.

 

게다가 권력은 부자지간에는 더더욱 나눌 수 없는 것이었고, 소현세자처럼 부친과 불화하다 억울한 죽음을 맞은 경우도 많았다. 다만 이 책에서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가 보여준 외교력과 협상력을 긍정적으로 보는 일반적인 시각과는 달리 ‘덮어놓고 열심히 하는 것이 문제’였다며 인조가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게끔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분석한다.

책 끝에 실린 시 한 수는 쓸쓸한 왕자들의 운명을 대변해준다.

 

(p.254)

벌판 위를 뒤덮은 무성한 저 풀들은

해마다 시들고는 다시 또 우거지니

들불로 태운다고 다할 리 없어

봄바람 불어오면 또다시 생겨나리.

아득한 향기는 옛길을 침노하고

해맑은 푸른빛은 옛 성터를 에워싸니

또다시 보내야 할 왕손이 가고 나면

자옥히 이별 정만 가득하리.

 

광해군의 폭정에 선조의 적장자였던 영창대군을 비명에 잃은 어머니 인목대비는 인조 10년(1632)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지 말아라”라는 유언을 친정집에 서신으로 보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연안 김씨는 조선왕조 말기 연안 김씨 집안의 김덕수가 조선왕실의 마지막 왕자 가운데 한 명인 의친왕과 혼인할 때까지 왕실 사람과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왕실과 혼인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로 왕자들의 삶은 고되고, 때로는 비참한 것이었다. 그들이 누렸던 부와 특권을 생각하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왕자라는 자리가 한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달콤한 것이었을까?

 

여염집에서 태어났다면 아버지에게 목숨을 잃는 일도, 형이나 동생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없이 천수를 누렸을 비운의 조선 왕자들. 이 책의 제목이 《비운의 조선 왕자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일말의 아쉬움이 있지만, 유려한 글솜씨로 그 왕자들의 사연을 숨 막히게 재밌게 풀어낸 이 책에 박수를 보낸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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