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소장 김지연)는 광화문 월대의 복원ㆍ정비를 위해 실시한 추가 발굴조사 과정에서 고종년간에 축조된 광화문 월대 아래에서 고종년간보다 앞선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구의 흔적을 일부 확인하였다. 이번 조사는 지난달 언론공개회를 통해 광화문 월대의 규모와 기초시설, 전체 모습 등 그간 조사가 끝낸 성과를 한 차례 공개한 이후에 추가로 한 발굴이다.
추가로 발굴한 월대 아래층에 대한 조사 성과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광화문 앞 공간의 퇴적양상과 활용양상을 확인하였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고종년간에 월대가 축조되기 이전에도 광화문 앞 공간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해오다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물적 증거까지 처음으로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 조선왕조실록 속 광화문 밖 공간 활용과 관련한 여러 기록
- 광화문 밖 장전(帳殿)에 납시어 친히 무과 시험을 보였다(세종실록 97권, 1442년)
장전(帳殿) : 임금이 앉도록 임시로 꾸민 자리를 이르던 말
- 광화문(光化門) 밖에 채붕(綵棚)을 맺고 잡희(雜戲)를 베풀게 하였다(세종실록 127권, 1450년)
채붕(綵棚) : 1. 나무로 단을 만들고 오색 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일종의 장식무대
2. 임금의 행차 때나 중국의 칙사를 맞이할 때 색실, 색종이, 헝겊 따위를 문이나 다리, 지붕 등에 내다 걸어 장식을 이르던 말
- 광화문 밖에 이르러 산대놀이를 구경하고 한참 뒤에 들어왔다(중종실록 90권, 1539년)
먼저, 이번 조사를 통해 광화문 밖 공간의 퇴적양상은 자연층에서 조선전기 문화층(14~16세기)과 조선중ㆍ후기 문화층(17세기 이후), 월대 조성층(19세기)을 거쳐 근현대 도로층(20세기)의 순으로 형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전기 문화층은 앞선 2007년 광화문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된 층으로, 이번에 발굴한 유구는 고종년간 월대의 어도지 서쪽 기초시설 아애 약 120㎝ 지점에 있는 조선전기 문화층의 맨 윗부분에서 확인되었다. 사각형 석재 1매(76×56×25cm)를 중심으로 양쪽에 남북방향의 석렬이 각각 한 줄씩 배열된 양상이며, 방형 석재의 가운데에는 지름 6cm의 철제 고정쇠가 박혀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궁중 행사에서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는 볕가리개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와 비슷하며, 경복궁 근정전이나 종묘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양쪽 석렬의 잔존너비는 약 85cm로, 길이 20~30cm의 크고 작은 석재가 일정한 너비를 이루며 남북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형태다. 이러한 석렬유구가 동쪽 어도지 아래층 탐색 구덩이 조사에서도 일부 확인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종년간 월대의 어도지 하층에 전체적으로 유사한 양상의 조선 전기 유구가 분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 석렬(石列) : 돌로 열을 지어 만든 시설
조선 중기~후기 유구는 조선전기 문화층을 일부 파괴하고 조성된 층에서 확인되었는데, 교란과 파괴가 심하며, 민가의 흔적 등도 확인되어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방치되어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후 고종 때에 이 층을 정리하고 다시 흙을 쌓아서 월대를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광화문 앞(육조거리)의 정비와 관련하여 ‘광화문 앞의 민가 중 어로(御路)에 불필요한 것은 모두 철거하였다(1865년 윤5월 18일)’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광화문 앞 공간에서는 고종년간 월대와 같은 형식의 건축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선 전기부터 바닥에 돌을 깔아 축조하는 방식의 시설들을 갖추고 다양하게 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의 기능이 상실되며 방치된 채 관리되지 못하다가 고종년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월대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