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봄이 사실상 마감되고 더위가 시작된다고 호들갑 비슷하게 떨던 게 보름 전, 그때 24절기 소만을 지났다고 했는데 다시 보름이 지나니 이젠 소만 다음의 절기인 망종이란다. 망종? 어감상으로는 망둥이 같은 종자... 뭐 이런 뜻이 아닐까 싶은데 그것은 한자로 ‘亡種’이고, 지금 이야기하는 절기상의 망종은 ‘芒種’이다. 앞의 ‘亡’은 망할 망이니 별로 전망도 없는 개망나니 같은 종자라는 뜻이라 생각되는데, 뒤의 ‘芒’은 작물의 수염 부분을 뜻하는 글자이니 곧 벼나 보리의 이삭 부분에 나오는 까칠까칠한 까끄라기(난 까시랭이로 들었지만 이게 표준어인듯)를 말함이렸다.
우리들이 도회지에 살다 보면 벼건 보리건 다 껍질을 벗기는 도정작업을 해서 매끈한 속 알곡만 보는데 우리 어릴 때는 시골에서 크다 보니 까끄라기들을 보는 것은 물론 여름에 보리 타작, 가을에 벼 타작한다고 탈곡기나 도리깨로 털어내는 과정에서 끼끄라기들이 공중으로 날아들어 목덜미가 근질근질한 경험이 다 있는데 우리야 그렇지만 우리 애들, 손주들은 이런 경험도, 이런 말도 모를 것이다. 경험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이 세상 식물의 생장에 관한 중요한 과정을 모르고 사는 것 같아서 적이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뭐 잡설이 길다. 아무튼 어제는 망종이었다. 이름 그대로 수염(까끄라기) 있는 종자, 곧 벼의 씨앗을 뿌리기에 좋은 때라는 뜻이다. 보리는 이 시기 이전에 수확해야 했고, 모내기가 시작되니 농가가 가장 바쁠 때의 정점, 곧 망종이란 벼와 같은 곡식의 종자를 뿌리기에 적당한 시기이자 모내기와 보리베기에 알맞은 때다. 또 이날엔 풋보리를 처음으로 먹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내가 배우기는 6월 한달 부지런히 모내기하고, 그것을 하지 이전에 끝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기에 요즈음은 모내기 철이다. 보리가 나오기 시작하니 보릿고개를 넘어서게 되는 것인데, 모내기를 하려면 비가 제때 많이 와 주어야 하는데 하늘이 어디 그런가? 영명하신 세종도, 그 아버지인 태종도 해마다 이 철에는 비가 오라고 빌고, 종자를 제때 심으라고 늘 독촉하며 살았던 것으로 실록에 기록돼 있다.
태종 16년 병신(1416) 4월 11일 호조(戶曹)에 명하였다.
“농사일이 바야흐로 성하니, 각도 각 고을 수령(守令)에게 문서를 보내어 망종 절기 전에 백성을 독려하여 종자 심기를 끝내고 늦추지 말게 하며, 또한 땅을 버려두어 못쓰게 하지 말라.”
세종 29년 정묘(1447) 4월 15일 때를 놓치지 않고 파종하도록 유서를 내리다
“밥은 백성의 하늘이니 농사는 늦출 수 없는 것이다. 온갖 곡식의 심고 뿌리는 것이 각각 때가 있는 것이니, 때를 만일 한번 놓치면 한해 내내 되찾을 수 없는 것이다. 도내에 파종(播種)이 이제 절반도 지나지 못 하였다고 하니, 생각하기를 망종이 아직 멀므로 그때까지는 괜찮으리라 하여서 이같이 늦어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망종이라는 것은 사고가 있는 사람이나 농사에 게으른 자가 비록 일찍이 갈고 심지 못했더라도 만일 망종까지만 하면 그래도 추수할 가망이 있다는 것이지, 반드시 망종을 기다려서 종자를 뿌리는 기한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망종에 비가 안 오니 술을 금하자는 건의도 있었다.
성종 24년 계축(1493) 5월 16일
사헌부 지평 윤장(尹璋)이 와서 아뢰기를,
“이제 망종이 이미 지났는데 가뭄이 매우 심하니, 술을 금하여 하늘의 경계를 삼가소서.”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올해에는 절기가 늦어서 가을보리는 바야흐로 거두어들이거니와, 봄보리는 혹 영글지 않은 곳이 있기는 하나 날씨가 가물뿐더러 땅도 기름지고 메마른 곳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은 과연 가물었으나, 어찌 한 도나 한 고을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하여 문득 술을 금할 수 있겠는가?”
올해 우리나라에는 봄 가뭄이 심하다가 다행히 최근 잇달아 비가 내려 모내기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다. 요즈음 누가 농사에 대해서 그리 신경을 쓸까? 우리는 망종이라는 절기를 모를뿐더러 말하는 것 자체가 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3년 전에 '망종'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나와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기를 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24절기를 다시 공부하는 기회가 되는 것 같다.
중국의 전통음악을 현대와 접목하겠다는 젊은 음악그룹 '음궐시청' (音阙诗听)이 24절기를 노래 소재로 삼아 차례로 발표하고 있는데 6번째로 나온 곡이 '망종'이고 이 노래 영상이 꽤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요즘 음악은 대부분 영상으로 보게 되고 거기에 중국말 노래 가사나 우리말 번역까지를 함께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도 중국 노래를 많이 듣고 영상도 시청하곤 하는데 반응이 좋고 젊은이들은 이참에 망종이 무슨 절기인지도 같이 공부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이 노래는 망종을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망종이라는 시점을 잡고 또 이때가 부처님 오신날과 비슷한 절기여서 불교적인 내용까지를 담아 사랑과 이별의 감정을 전하는데 우리나라 걸그룹 풍(風)의 경쾌한 리듬을 중국의 전통 악기에 의한 전통선율을 바탕으로 표현하고 있어, 나름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올해는 망종과 현충일이 겹쳤다. 현충일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의 침략에 대항하며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수많은 영령을 기억하고 기려주는 날이다. 마침 망종이라는 절기와 겹치니 망종이라는 말을 다른 한자로 풀어보고 싶다. 말하자면 현충일이야말로 '종(種, 혹은 宗)을 잊어버리면(忘) 안되는 날'이라 할 수 있겠다는 뜻이다. 이날에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희생이 우리의 마루(宗)이며 근본 뿌리(種)라 한다면 이날은 망종(忘宗)하면 안 되는, 망종(忘種) 하지 말아야 하는 날이라고 풀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오늘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고비인 망종이라는 절기도 그냥 지나고 나면 아무 의미 없는 하루이지만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근본이 곡식이고. 우리가 대를 이어가며 살 수 있는 것도 그런 뿌리가 있기 때문임을 잊지 않는다면 어제 망종은 우리가 오늘날처럼 모든 이들이 그나마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들을 잊지 않고 생각해주는 날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집안 어른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도와주다가, 재산도 많이 날리고 해서 어렵게 사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을 돕기 위해 애쓰는 친구가 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하니 현충일과 겹치는 올해 6월초 망종을 맞으면 우리 주위에서 우리의 근본을 위해 애쓰신 분들을 잊지 않고 챙겨주는 마음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