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의 어깨는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저 가녀린 허리가 버텨낼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희뿌연 하늘에 눌려서도 아닌 것 같고, 둘러매고 있는 전기기타의 무게 때문도 아닌 것 같았다.
워낙 비실비실한 체질이란 게 한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제 연락하지 마라. 네 마음 안다. 고맙다.
그저 바람 따라 떠다니다 때 되면 갈란다.“
금방이라도 양회가루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낮은 구름에 온갖 매연까지 뒤섞인 바람이 빛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가 골목 끝자락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그의 실루엣은 대기에 스며들고 말았다.
태민호!
어쩌면 그에게는 태민호라는 이름을 얻기 전, 그러니까 장효민이라는 이름으로 살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집은 비록 서울의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문안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번듯한 양옥은 아니지만 여섯 식구 궁둥이 붙이기엔 부족함이 없을 정도에다 문간채의 방 두 개는 세를 놓을 정도의 살림은 되었다. 대학도 그가 음악에 빠져 안 간다고 버텨 그렇지, 돈이 없어 못 보낸 것도 아니었으니 60년대의 가정치곤 중류 이상은 되었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일찌감치 음악에 빠져들었다.
주한 미군 방송인 AFKN에서 우연히 들은 에디 아놀드(Eddy Arnold)의 목소리에 흠뻑 젖어 들었다.
‘테네시의 태양’이라는 별명이 붙은 에디 아놀드의 ‘I really don't want to know(난 진정 알고 싶지 않아요)’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한 소년을 올빼미로 만들고 말았다. 그 감미로운 목소리와 노랫말이 귓 골에 메아리쳐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부자나라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회상이나 가치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기에 여드름 돋듯 호기심이 돋아났다.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품에 안아도 되나?
그런 여자의 과거를 다 묻어 두고 오로지 그 여인만을 사랑하겠다는 남자가 있다니?“
당시 우리의 도덕관이나 애정관, 사회통념은 미국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에 소년 효민의 머릿속은 환삼덩굴(삼과에 속하는 덩굴식물)로 뒤덮였다. 그때부터 그는 미국을 알기 위해 용산 미군기지 주변을 기웃거렸고, 거기서 알게 된 어느 미군 병사에게 기타를 배우며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된다.
화양연화!
누구에게나 꽃피는 봄날 같은 시절은 있기 마련, 그의 화양연화는 군 제대를 하고 한 일 년 남짓일 것이다. 고교 밴드부와 군악대에서 꾸준히 음악 실력을 닦은 그는 전국 규모의 노래자랑에 나가 그의 애청애창(愛聽愛唱)곡인 ‘I really don't want to know’를 불러 지역 예선은 물론 연말 결선에서 우승을 거머쥔다. 그 반향은 예상을 웃돌았다. 경연대회 출신 가수들이 트로트 일색이었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미성을 가진 팝 가수의 등장은 음반계에서 입맛을 다시기에 충분했다.
먼저 손석우 작곡가가 손짓했다.
청년 효민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손석우가 누구인가?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로 전국 경향 각처는 물론 하고 일본, 대만에다 태국,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까지 노란 물을 들여놨던 당대 최고봉이 아니던가. 그 손석우가 자신이 설립한 “븨너스 레코드”와 계약을 맺자고 먼저 제안해 왔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손석우의 강력한 맞수로 떠오르고 있는 박춘석도 뛰어들었다.
“미도파 레코드”에서 막 간판을 바꿔 달은 “지구 레코드”로 오라는 것이었다. 청년 효민은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했으나 그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가 팝 계열인데다가 그는 손석우 작품의 격조와 세련미를 동경하기 때문이었다.
신인가수 효민은 손석우로부터 “태민호”라는 예명을 입사 선물로 받고 곧바로 <내 이름은 방랑자>와 <여왕벌> 취입 작업에 들어갔다. 손석우는 태민호 말고도 자신이 발탁한 여섯 명의 가수를 보태 모두 일곱 명의 노래가 들어간 10인치 음반을 “새 얼굴 새 목소리”는 제목을 달아 기획반으로 내놓았다.
손석우를 비롯한 회사 관계자들 모두 열두 곡의 수록곡 가운데 적어도 한두 곡은 뜰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민망하게도 단 한 곡도 히트곡을 내지 못한 채 사장품(死藏品)이 되고 말았다.
“잘은 모르지만 제 생각엔 편곡이 좀 아쉬워요. 당시 우리나라엔 생소한 홍키통키로 하지 말고 차라리 ‘노란샤쓰’처럼 힐빌리 칸츄리로 했으면 ...
‘노란샤쓰’ 때문에 사람들 귀에 익어 있기도 했고.“
가을이 제법 깊었는데도 아직도 얇은 옷차림으로 말없이 설렁탕 국물을 떠 넣던 그의 대답은 “글쎄”라는 단 한마디였다.
그 짧은 한마디에 지난 40년이 다 들어 있었다.
노래자랑에서 우승했던 일, 당대 최고의 작곡가 둘이 쟁탈전을 벌이던 일,
일곱 명의 신인 가운데 자신의 노래가 1면 첫 곡에 뽑히던 일 그리고 밤무대에서 무명가수로, 무명악사로 끼니를 구걸하며 살아 온 회한의 세월이.
그는 음반이 실패로 끝나자, 지옥보다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든가 “한 번 실패는 병가지상사”라는 말은 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다시 한번 해보자”는 손 선생의 독려도 “한 번 더 도전해 보라”라는 주위의 권유도 두려울 뿐이었다.
그는 끝내 그 좌절과 실의를 이겨내지 못한 채 패배주의에 안주하고 말았다.
“이젠 써 주질 않아”
“저희 가게에 계세요. 넉넉히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너도 운영이 어려운 것 같던데…. 폐 끼치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아.”
그는 그렇게 구부정한 뒷모습을 내 망막에 새겨 넣고 가을밤 속으로 떠났다.
수록곡
1면
1 내 이름은 방랑자 – 태민호
2 사랑은 왜 했던가 – 김지미(영화배우 김지미와는 동명이인)
3 여왕벌 – 태민호
4 새빨간 장미꽃 _ 배은희
5. 작은 별 – 라운
6 별과 이야기 – 한송자
2면
1 지는 꽃 피는 꽃 – 한송자
2 서울로 온 삼돌이 _ 최수동
3 미처 몰랐네 _ 배은희
4 꿈에 본 그 사람 – 김지미
5 보슬비 내리는 초저녁 길 – 김지미
6 제복의 청춘 – 정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