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마음을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는 날

  • 등록 2024.02.11 12: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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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 재발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2024년 갑진년 푸른 용해가 밝았다. 지난해 나라가 온통 어수선해 온 국민의 시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제 밝아온 새해는 지난해의 시름을 떨쳐 버리고, 힘찬 한 해가 되기를 비손해 본다.

 

설날,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여 세배하고 성묘하며, 정을 다진다. 또 온 겨레는 “온보기”를 하기 위해 민족대이동을 하느라 길은 북새통이다. “온보기”라 한 것은 예전엔 만나기가 어렵던 친정어머니와 시집간 딸이 명절 뒤에 중간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던 “반보기”에 견주어 지금은 중간이 아니라 친정 또는 고향에 가서 만나기에 온보기인 것이다.

 

 

설날의 말밑들

 

설날을 맞아 먼저 “설날”이란 말의 유래를 살펴보자.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년)의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설날을 “달도일(怛忉日)”이라고 했다. 곧 한 해가 지남으로써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하는 말이다. 그리고 '사리다' 또는 삼가다.'의 `살'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다. 여러 세시기(歲時記)에는 설을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표현하고 있는데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라는 뜻으로 본다.

 

또 '설다. 낯설다'의 '설'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도 이야기도 한다. 처음 가보는 곳은 낯선 곳이며,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이다. 따라서 새해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낯설다고 생각하여 ‘낯선 날'이 되었고, 이 '설은 날'이 '설날'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그밖에 나이를 말하는 곧 "몇 살(歲)" 하는 '살'(산스크리트어)에서 비롯됐다는 연세설과 한 해를 새로이 세운다는 뜻의 "서다"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설날 세배하는 법과 조선시대 마침형 덕담 그리고 세함

 

 

설날의 가장 대표적인 명절풍습은 뭐니 뭐니 해도 세배다. 부모님이나 집안 그리고 마을 어른들께 드리는 이 새해 인사도 격식에 맞춰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자의 세배는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양손을 어깨 폭만큼 벌린 다음 손가락은 모은 채 약간 바깥쪽으로 향하게 한 뒤 서서히 몸 전체를 굽힌다. 남자는 왼손을 오른손 위에 포개는 것이 바른 세배법이다. 손을 잡는 법을 '공수법'이라 하는데 남녀가 반대이고, 절을 받는 사람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일 경우는 또 반대다.

 

세배하면서 흔히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처럼 명령 투의 말을 하는데 이것은 예절에 맞지 않는다. 세배한 뒤 일어서서 고개를 잠깐 숙인 다음 제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세배를 받은 이가 먼저 덕담을 들려준 뒤 세배한 사람이 이에 화답하는 예로 겸손하게 얘기를 하는 것이 좋다. 덕담은 덕스럽고 희망적인 얘기만 하는 게 좋으며 지난해 있었던 나쁜 일이나 부담스러운 말은 굳이 꺼내지 않는 게 미덕이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새해 인사는 없었다. 그것은 명령처럼 들린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면도 있지만 조선시대엔 그보다도 마침형 덕담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고모님께서 새해는 숙병(宿病)이 다 쾌차(快差)하셨다 하니 기뻐하옵나이다.” 이 글은 숙종임금이 고모인 숙희공주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숙종은 고모의 오랜 병이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숙병이 쾌차했다 하니 기쁘다.”라며 아직 병중이건만 이미 병이 다 나은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조 때 사람 한경(漢經)은 하진백(河鎭伯) 집안사람들에게 문안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 보면 하진백이 과거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을에 있을 과거에서 급제했다며 미리 축하의 덕담을 보내고 있다.

 

이밖에 명성왕후(明聖王后, 현종 비)가 셋째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보낸 편지, 인선왕후가 숙휘공주(딸)에게 보낸 편지, 순원왕후가 김흥근(재종동생)에게 보낸 편지 등도 모두 이렇게 미리 좋은 일이 있다는 예견의 덕담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미래의 기쁜 일이 마치 완료된 것처럼 "마침형(완료형)"으로 덕담하는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에 집안 어른과 친지에게 감사의 뜻으로 올리는 세배도 했는데 이는 묵은세배이며, 구세배(舊歲拜) 또는 그믐세배라고도 했다. 섣달그믐을 까치설 곧 작은설이라 했는데, 설과 같이 어른이나 조상신에게 세배를 올린 것에서 유래하였다.

 

 

또 옛 풍습 가운데는 연하장하고는 좀 다른 연하방명록이라 할 만한 것도 있었다. 한양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에 따르면, 설날부터 정월 초사흗날까지는 모든 관청은 쉬고 시전 곧 시장도 문을 닫고 감옥도 비웠다. 이 사흘 동안은 정승, 판서 같은 높은 벼슬아치들 집에서는 사람은 문 안으로 들이지 않고 사흘 동안 세함만 모아 두었다. 흰종이로 만든 책과 붓ㆍ벼루만 책상 위에 놓아두면 하례객이 와서 이름을 적었고 이름 세함이라 하였다. 새해부터 고관대작들에게 밀려드는 청탁성 인사를 꺼렸던 선비들의 마음은 아닌지 모른다.

 

첨세병에 ‘꿩 대신 닭’ 그리고 세주불온

 

설날이 되면 가래떡을 썰어 끓인 떡국을 꼭 먹었는데 떡국에 나이를 더 먹는 떡이란 뜻의 '첨세병(添歲餠)'이라는 별명까지 붙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떡국을 겉모양이 희다고 하여 ‘백탕(白湯)’, 떡을 넣고 끓인 탕이라 하여 ‘병탕(餠湯)’이라고도 적고 있다. 보통 설날 아침에 떡국으로 조상제사의 메(밥)를 대신하여 차례를 모시고, 그것으로 밥을 대신해서 먹었다.

 

떡국의 국물을 만드는 주재료로는 원래 꿩고기가 으뜸이었다.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풍속에서 배워온 매사냥이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놀이로 자리를 잡으면서 매가 물어온 꿩으로 국물을 만든 떡국이나 만둣국 그리고 꿩고기를 속으로 넣은 만두가 고급 음식으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일반 백성에겐 꿩고기란 구경하기도 어려운 것이어서 대신 닭고기로 떡국의 국물을 냈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란 말이 생겼다. 그러나 요즘 떡국의 국물은 꿩고기나 닭고기로 만들지 않고 쇠고기로 만든다.

 

설날에 술을 마시는데 ‘설술은 데우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세주불온’(歲酒不溫)'이라고 하여 찬술을 한 잔씩 마셨다. 이것은 옛사람들이 정초부터 봄이 든다고 보았기 때문에 봄을 맞으며 일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에서 생긴 풍습이었다. 또 설에는 산초, 흰삽주뿌리, 도라지, 방풍 등 여러 가지 한약재를 넣어서 만든 도소주(屠蘇酒)를 마셨는데 이 술은 오랜 옛날부터 전하여 오는 술이다. 이 술을 마시면 모든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설날의 재미난 풍속들

 

설날에는 여러 가지 세시풍속이 있다. 사돈 간 부인들이 새해 문안을 드리려고 하녀 곧 문안비(問安婢)를 보내기도 한다. 설날 꼭두새벽 거리에 나가 맨 처음 들려오는 소리로 한 해의 길흉을 점치는 청참(聽讖), 장기짝같이 만든 나무토막에 오행인 금ㆍ목ㆍ수ㆍ화ㆍ토를 새긴 다음 이것을 던져서 점괘를 얻어 새해의 신수를 보는 오행점(五行占) 풍속도 있다.

 

또 남녀가 한 해 동안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빗상자 속에 넣었다가 설날 해가 어스름해지기를 기다려 문밖에서 태움으로써 나쁜 병을 물리치는 원일소발(元日燒髮), 섣달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고 했으며, 아이들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잠들면 잠든 아이들의 눈썹에 떡가루를 발라 놀려주던 해지킴(守歲)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양괭이귀신 곧 야광귀(夜光鬼) 풍속도 있다. 양괭이귀신은 섣달그믐날 밤, 사람들의 집에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가버리는데, 그 신의 주인은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양괭이귀신을 두려워하여 신을 감추거나 뒤집어 놓고 잠을 잤다. 그리고 채를 마루 벽이나 장대에 걸어 두었다. 그것은 야광귀가 와서 아이들의 신을 훔칠 생각을 잊고 채의 구멍이 신기하여 구멍이 몇 개인지 세고 있다가 닭이 울면 도망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섣달그믐날 밤에 쌀을 이는 조리를 새로 만들어 복조리라 하여 붉은 실을 꿰매어 부엌에 걸어 두는 복조리 걸기 풍습도 있다. 한 해 동안 많은 쌀을 일 수 있을 만큼 풍년이 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예전에는 새해부터 정월대보름까지 "복조리 사려!"를 외치며 다녔다. 이때 산 복조리를 부뚜막이나 벽에 걸어 두고 한 해의 복이 가득 들어오기를 빌었다. 또 복조리로 쌀을 일 때는 복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었다. 남정네들은 복을 갈퀴로 긁어모으라는 뜻으로 복갈퀴를 팔고 사기도 했다.

 

설날은 구정이라 부르면 안 된다

 

즈믄 해(수천 년) 내려오던 우리 겨레의 큰 명절인 설은 《고려사》에는 설날ㆍ대보름ㆍ한식(寒食)ㆍ삼짇날ㆍ단오ㆍ한가위ㆍ중양절(음력 9월 9일)ㆍ팔관회(음력 10월 15일)ㆍ동지를 ‘구대속절(九大俗節)’로 지낸다고 했고, 조선시대에도 설날ㆍ한식ㆍ단오ㆍ한가위를 4대 명절로 꼽을 만큼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오래된 전통이었다. 중국 사서인 《수서(隋書)》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도 신라인들이 설날 아침에 서로 인사하며,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도 설날을 “구정”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구정(舊正)"이란 신정 곧 "新正"이 양력설을 말하는 데 견주어 음력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를 강제병합한 일본제국주의 영향인데 일본은 명치 이후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쓰면서 조선에서도 고유의 설날을 이중과세라 하여 중지시키고 자기네 명절을 따르도록 한데서 생긴 말이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조선의 향토오락》이란 책을 펴낸 이후 우리말, 우리글,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고 민속놀이를 금지했다. 그와 더불어 민족정신을 없애려 했던 맥락에서 우리의 설날을 ‘구정’이라고 깎아내렸다. 이후 해방이 된 뒤에도 우리 겨레의 명절인 설날은 줄곧 양력설에 눌려 기를 못 폈다.

 

하지만, 국민은 한결같이 설날을 지켜왔는데 드디어 정부가 1989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고쳐 설날인 음력 1월 1일을 전후한 3일을 공휴일로 함에 따라 이젠 설날이 완전한 민족명절로 다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일제의 의도된 한민족 깎아내리기로 쓰던 말 “구정”은 절대 써서는 안 된다.

 

설날에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

 

설은 그저 먹고 노는 날이 아니다. 각종 세시기가 설을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롭게 새해를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서양에서 들어온 성탄절, 밸런타인데이, 핼러윈데이 같은 날들을 마치 우리의 명절처럼 지내고 있는 점이다. 이런 것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 겨레는 우리의 명절이었던 설, 한가위와 더불어 삼짇날, 단오, 유두, 중양절과 같은 명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날들은 이제 문헌 속에만 남게 된 느낌이다. 더 나아가 겨우 명절로 명맥을 유지하는 설날이나 한가위도 윷놀이, 쌍륙놀이 같은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는 외면하고 일본이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려 들여보낸 화투에 열광한다.

 

 

우리가 배달겨레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하려고 한다면 서양 것이나 일본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인 것을 지켜내고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건 살려내야 하지 않을까? 갑진년 설날을 맞아 설의 참된 뜻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마음을 바짝 가다듬고 새날을 세워보자.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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