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문편부(廣問便否, 좋은지 나쁜지를 널리 물어보다)

  • 등록 2024.04.11 1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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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11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일처리에 앞서 문제점을 조사하고 옛 문헌과 자료를 살피고, 여러 사람에게 물으며, 관계자와 토론하며 더 좋은 방안을 찾으려 했다. 답을 찾은 후에는 항식(恒式, 항상 따라야 하는 형식이나 정해진 법식)으로 법제화하고자 했다. 이런 과정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옳고 그른 것인지 널리 물었다.

 

여기 세종 4년에 한증소의 이익과 무익에 대해 논의한 예가 있다.

 

예조에 전지(傳旨)하기를, "병든 사람으로 한증소(汗蒸所)*에 와서 당초에 땀을 내면 병이 나으리라 하였던 것이, 그 탓으로 죽은 자가 흔히 있게 된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널리 물어보아(廣問便否)’, 과연 이익이 없다면 폐지할 것이요, 만일 병에 이로움이 있다면, 잘 아는 의원을 보내어 매일 가서 보도록 하되, 환자가 오면 그의 병증세를 진단하여, 땀낼 병이면 땀을 내게 하고, 병이 심하고 기운이 약한 자는 그만두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4/ 8/ 25)

 

* 숯이나 도자기를 굽고 남은 가마 속 열기로 땀을 내 몸의 독소를 배출하던 곳

 

또 다른 예로 세종 17년 좌의정 최윤덕이 국경방비에 따른 군사시설정비, 무기 정비, 성 쌓기, 훈련, 도로와 진지구축, 식량비축, 방비와 군사훈련 등 비변사(備邊司)가 마땅히 할 일을 아뢰었는데 20여 개 조항이 넘었다.

 

1. 평안도의 병선(兵船)을 정박(碇泊)할 곳이 없어서 배를 육지에 두니, 작은 배를 만들어서 띄워 정박시켜 두고,

 

1. 평안도의 일이 없이 한가하게 지내는 사람에게 활쏘기와 말타기를 시험하고 말 몇 마리를 세어 토관(土官, 조선 시대, 평안도와 함경도의 변방 토착민에게 주었던 특별한 벼슬)을 제수하고,

 

1. 평안도의 대령(大嶺,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 사이에 있는 고개)과 험한 길을 수리할 것.

 

1. 화포와 화살이 모두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공장(工匠)을 보내어 고쳐 만들 것.

 

1. 양계(兩界, 함경도와 평안도)의 변경에 있는 고을에 튼튼하게 성을 쌓아서 여러 목책(木柵)에 사는 사람들을 겨울이면 읍성(邑城)에 모아 보호하게 할 것.

 

크기를 조절하는 등 구체적인 사항도 있다.

 

1. 연변에 성을 쌓는 것이 안쪽에는 작은 돌로 메우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니, 이제부터는 모두 큰 돌을 쓸 것.

 

1. 평안도가 금법(禁法,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범하여 몰수한 자질구레한 물건을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 물소뿔[水牛角]과 진사(眞絲, 광물의 하나)를 사들여 와 각궁(角弓, 쇠뿔 따위로 만든 활)을 만들게 할 것.

 

1. 기(旗)와 깃대를 될 수 있는 대로 가볍게 하고, 깃대의 양끝에 칼날을 박을 것.

 

1. 갑옷을 만들 때 소매를 짧게 하여 되도록 경쾌하게 할 것.

 

1. 평안도ㆍ황해도 직로(直路, 곧게 뻗은 길)의 말이 지극히 야위고 피곤하였으니, 풀이 자랄 때까지 관가에서 사료로 콩을 줄 것.

 

1. 궁궐과 서울과 시골의 관아가 거의 완비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급하지 않은 공사와 긴요하지 않은 역사는 일체 정지하여 그만두고, 오로지 백성을 기르고 변방을 방비하는 것으로 일을 삼을 것입니다." 등 20여 건이 넘었다. 이를 병조에 내려 세 의정(議政,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과 더불어 의논하게 하매, 의논하여 아뢰기를,

 

"다른 조목은 모두 아뢴 것에 따르고, 오직 수군(水軍)을 감하고 육진(陸鎭)을 두자는 조목은, 해적을 제어하는 데는 선군(船軍, 수군-水軍을 이르던 말) 같은 것이 없으니 예전 그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고, 작은 배로 고쳐 만들자는 조목은 그 도의 관찰사가 편한지 아닌지를 널리 물어서 임금에게 글을 올리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고, 도로를 수리하자는 조목은 연변의 성보(城堡, 임시로 쌓은 작은 산성)가 완비되고 주민들이 정착되기를 기다린 연후에 하고, ...

 

각 고을의 성을 안쪽과 바깥쪽을 똑같이 축조하자는 것은 박곤(朴坤)의 아룀으로 인하여 이미 일찍이 함께 의논하여 내려주었사오니, 이미 이루어진 규식(規式)에 의하여 시행하고, 각도 병선의 조목은 전함(戰艦)을 더 설치하는 것이 이익이 되기는 하나, 배를 탈 군사가 그 액수를 채우기 어려워서 지금 각 포구에 아직도 빈 배가 많으니, 아직은 예전대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성을 보존하여 적을 물리친 자를 포상하자는 조목은 양편 군사가 맞붙으면 기정寄正, 기병(奇兵, 적을 기습하는 군대)과 정병(正兵)의 허함과 실함이 천태만상이고, 존망(存亡)과 성패(成敗)가 호흡(呼吸) 사이에 있거니와, 만일 단단한 성에 웅거하면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할 수가 있우며, 싸우고 지키는 것의 어렵고 쉬운 것이 원래가 같지 않으니, 일체로 공을 의논할 수가 없고, 그 중의 특이한 자만을 적당히 포상을 가하고, 군관를 기르는 데 쓰는 비용과 역마의 사료콩에 대한 조목은 호조로 하여금 마감하게 하고,...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17/4/13)

 

 

또 다른 예로는 생선과 소금의 정책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찬성 신개 등에게 생선과 소금의 정책에 관하여 논하게 하다) 정사를 보았다. 찬성 신개ㆍ호조 판서 심도원ㆍ동지 중추원사 정흠지 등에게 명하여 생선과 소금의 정책을 논의하게 하고, 전교하기를,

 

"적당한가 아니한가를 널리 물어서 조용히 생각하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민폐(民弊)가 없게 하라."

 

하고, 곧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조극관(趙克寬)ㆍ이조 정랑 우효강(禹孝剛)ㆍ호조 정랑 민후생(閔厚生) 등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이 앞서 관에서 어량(魚梁, 한 군데로만 물이 흐르도록 물길을 막고, 그곳에 통발을 놓아 고기를 잡는 장치)과 염조(鹽竈, 소금을 만드는 솥)도 없이 단지 그 세만 거두었는데, 이에 이르러 국가에서 하삼도(충청ㆍ전라ㆍ경상) 백성을 구제함으로 인하여 창고가 모두 말라서 재정이 펴지 못하므로, 어량과 염조를 널리 두어서 그 이익을 거두어 흉년을 구제하는 준비책으로 삼고자 한 까닭으로 이 명이 있었다. (《세종실록》 19/4/12)

 

세종은 어떤 일을 이루기 전에 먼저 사맛[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묻는 곧 ’광문편부(廣問便否)’ 정신으로 일에 임했다.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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