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삐띠기”라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마을 사람들 아무도 모릅니다.
이사 올 때부터 벌써 그렇게 부르더랍니다.
커서 생각해 보니 우리 마을은 참 이사도 많이 오고 많이 가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몇 대를 진득하니 눌러사는 집안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나루터가 있어 오기도 쉽고 가기도 쉬워 그런지, 언덕배기 강마을이라 논이 없어 그런지 우리 집안을 비롯해 서너 집안만이 4~5대 이어 살 뿐이었습니다.
삐띠기는 나보다 서너 살 위였던 것 같습니다.
“배텃거리”와 “웃배기미” 다해서 스무나믄 집 정도 되는 곳이라 또래가 드물어 서너 살 차이는 그냥 동무로 지냈었지요. 삐띠기는 나의 두 번째 색시였습니다. 첫 번째 색시인 언년이도 나보다 세 살 많았지요. 차분하게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프다는 얘기가 들리고 몇 달 뒤 언년이 엄마가 딸을 가슴에 묻었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삐띠기는 학교를 안 다녔습니다.
동갑내기 금복이와 장표가 학교에 가고 나면 마을에 어린애라곤 우리 둘밖엔 안 남았지요. 나이에 비해 덩치도 크고 힘이 센 삐띠기에겐 소꿉장난은 이미 시시한 놀이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어려서 자치기나 비석치기, 땅따먹기 같은 놀이들을 잘 못했기 때문에 아마 “울며 겨자 먹기”로 소꿉놀이를 했을 겁니다.
삐띠기는 차돌을 빻아 쌀밥을 짓고 회색 돌로는 보리밥을, 붉은색 돌을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고, 풀을 뜯어다 김치를 담가 밥상을 차려 냈지요. 삐띠기가 밥을 짓는 동안 나는 고무신을 뒤집고 말아 만든 도라꾸(트럭)를 타고 장에 다녀 와 단란한 식사를 하는 놀이를 했는데, 식사를 마치면 밤이 되었다며 호롱불 끄는 시늉을 하고 가마니를 덮고 느티나무 그늘에 누었다가 진짜로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청보리 풋내가 강바람에 실려와 우리를 감싸 주었지요.
“아이구야! 이기 누구나? 그 쪼만하든 기 하마 이렇게 컸나?”
삐띠기를 다시 만난 건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중학생 때였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무척 오랜만에 고향 작은집에 다니러 갔을 때였지요. 저고리 밑단으론 참외만 한 젖이 출렁거리고 엉덩이는 바가지 엎어 놓은 것 같은 말만 한 처녀가, 자기 큰 건 모르고 남 큰 것만 눈에 들어오니 우습기도 하고 누나라 불러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몰라 어정쩡해 있는데 그녀가 처녀 뱃사공이 된 사연을 들려주며 어색함을 강물에 풀어버리더군요.
“니 여서 일 학년 댕기다 갔제? 느들 나가고 맷해 있다가 아부지 돌아가시고 오빠가 배봤는데 오빠가 을매 전에 군대 가는 바람에 내가 배본다.”
1972년, 그러니까 십여 년 만에 고향을 다녀온 지 네 해 지나서였지요. 남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 “베티”가 중국으로 빠져나가며 간접 영향권에 든 우리나라에 엄청난 비를 뿌려 전국에 물난리가 난 그 여름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달동네”는 서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산꼭대기였답니다. 종로구의 창신동, 숭인동에서 쫓겨 온 철거민들이 사는 구역을 “종로” 마포구 도화동 일대에서 온 사람들이 사는 구역을 “마포”, 청파동 일대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구역을 “용산”이라 부르며 사는 동네였지요.
그런 우리 동네를 “베티”가 뿌리고 간 집중호우의 수마가 할퀴었습니다. 장대는 아니어도 정말 지게작대기만은 하더군요. 세상에나 세상에나 빗줄기가 어찌 그리도 굵던지. 이틀 밤낮을 그렇게 쏟아붓던 빗줄기가 새벽녘에 좀 잦아들자, 사이렌이 울리고 다급한 고함소리가 골목을 깨우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산사태다! 빨리들 대피하시오!”
산사태의 무서움을 모르는 나는 책가방을 챙기느라 뒤늦게 나섰다가 통장님께 호통을 들었지요. 예비군 아저씨들의 안내에 따라 대피소인 아랫동네 교회당에 들어서니 이미 울음바다가 되어 있더군요. 새벽에 “용산” 쪽 뒷산이 무너져 수많은 사람이 땅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공무원들이 끓여주는 강냉이죽으로 떨리는 속을 달래고 ‘용산’ 언덕길을 달음질쳐 올라서 본 그 처참한 광경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지요.
아무리 맥없는 판잣집이라 해도 그렇지 수십 채의 집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예비군들과 군인들이 뒤엉겨 삽으로 곤죽이 된 흙더미를 치우느라 닭똥만 한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주검이 수습되어 들것에 실려질 때마다 신원을 확인하느라 유족들이 몰려들었고 잠시 뒤엔 대성통곡 소리가 들려오는 게 되풀이되었지요.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라 일가족이 모두 참변을 당한 집이 수두룩했습니다. 초가도 한 채 없는 산비탈에다 철거민들을 내모느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남겨놓지 않고 육산을 깎아 버렸으니, 고교생인 내가 보기에도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요. 다리를 후들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대피소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웅성대더군요. 나라 구석구석이 수해를 안 입은 곳이 없고, 특히나 한강수계 쪽의 피해가 더욱 크다는 것이었지요.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만화가게로 달려갔습니다. 주인아저씨도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텔레비전으로 특집보도를 지켜보고 있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남한강 상류에 있는 고향마을도 예외 없이 초토화되었다는 것이었지요. 할머니와 작은댁 식구들이 떠올랐습니다. 귀가 조치가 떨어지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돼지저금통을 깨 라면부터 한 박스 샀지요. 그걸 둘러매고 청량리역으로 갔더니 중앙선 열차는 철도가 끊겨서 운행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역무원 아저씨를 붙들고 무슨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더니 정 그러면 서울역에서 경부선을 이용해 조치원으로 가서 충북선으로 갈아타고 제천으로 간 뒤 거기서 상황에 따라 알아서 하라고 알려주더군요.
참으로 오랜만이었지요.
그렇게 넓어 보이던 역 광장도 거대한 바위산처럼 웅장하던 역사(驛舍)도 보잘것없이 쪼그라들어 있더군요. 눈높이에 따라 세상이 달라지는 원리를 그날 제천역에서 처음 깨달았답니다.
종식이 형님이었습니다. 어떤 군인이 나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알아보고 다니기에 혹시나 하여 가까이 가서 엿들었더니 그도 나와 같은 곳을 가기 위해 차편을 알아보고 다니더군요. 다가서 보니 다름이 아닌 삐띠기 오빠 이종식 형님이었지요.
그도 고향집이 걱정돼 특별휴가를 내서 달려왔다더군요. 이내 날이 저물어 우리는 대합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동이 트자마자 갈 방법을 알아보고 다니다 몇 시간 만에 군용트럭을 얻어 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30여 리 떨어져 있는 부대로 가는데, 거기도 막사를 비롯한 모든 시설이 떠내려가 복구 작업을 도우러 간다더군요.
가다 보니 불도저들이 총동원되어 임시도로라도 개통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나 갔을까? 차가 멈추더니 한동안 움직이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끊긴 길의 거리가 너무 길어 언제 통행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말이 들려오더군요.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서울서부터 짊어지고 갔던 라면은 군인들에게 주고 대신 건빵 몇 봉지를 얻어 길을 나섰지요.
다행히 철길은 비교적 피해가 적어 그 길로 걷고 또 걸었습니다. 하지만 70여 리나 되는 길이라 해거름이 되어서야 마을 건너편에 다다랐답니다.
상전벽해*!
황폐나 초토화보단 상전벽해가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습니다.
선사시대 대홍수기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마을 쪽을 건너다보니 인가라곤 한 채도 안 남았고 뒷산 중턱의 공회당만 한 채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의 놀이터였고 마을의 노래자랑이나 그네 타기 시합터며, 잔치터였던 느티나무들도 모두 사라지고 안 보이더군요. 언제 심었는지 모르지만, 어느 선조께서 몇백 년 뒤의 후손을 위해 심어 놓은 그 노거수들이 송두리째 뽑혀 나간 걸 보니 얼마나 큰 개락*이었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우리가 오긴 제대로 온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지요. 물이 빠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황톳빛이었고,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가는 게 무슨 해협 같더군요. 공회당 마당에 흰 천막도 보이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걸 보니 거기가 대피소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손나팔을 지어 힘껏 소리를 질렀지만, 알아듣질 못했고 그쪽 또한 우리에게 무언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으나 우리 쪽에서도 잘 들리질 않더군요. 다만 누군가가 손을 가로젓기도 하고 내젓기도 하는 걸 보니 건너올 수가 없으니 그냥 가라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망설이고 있을 때 한 여인이 뛰어 내려오는 게 보이더니 나룻배로 달려가더군요.
삐띠기!
틀림없는 삐띠기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배를 무슨 수로 지켜냈는지, 집은 다 떠내려가고 없어도 배는 보이더군요. 삐띠기가 뱃줄을 풀어 삿대질을 시작하자 말리려는 마을 사람들이 달려오는 게 보이고 종식이 형님도 있는 힘을 다해 돌아가라고 소리쳤으나 그녀는 끝내 윗 여울까지 거슬러 올라가 건너편을 향해 힘껏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윗 여울과 아래 여울 사이는 300여 미터밖에 안 되는 데다 아래 여울에 닿기 전에 날카로운 강 바위들이 몰려있는 곳이 있어 사실상 배가 건널 수 있는 데는 100미터도 채 안 되는 나루였지요.
삐띠기는 용감하게 노를 저었지만, 물살은 보기보다 훨씬 더 세 삐띠기가 탄 배는 종이배처럼 떠내려가더군요.
“종순아, 종순아 아이고 종순아”
종식이 형님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에 부딪힌 배는 빙글 한 바퀴 돌더니 그만 여울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강의 이무기는 해마다 여인 하나를 데려간다고 하지요.
그 해에도 그렇게 여인 하나를 데려갔습니다.
처녀 뱃사공
(윤부길 작사, 한복남 작곡, 황정자 노래)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낙동강 강바람이 앙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 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보내마
어머님 그 말씀에 수줍어질 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한국전쟁이 휴전을 맺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악극단장 윤부길은 그때 자신의 유랑 악극단을 이끌고 경남지방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악양 나루터를 건너게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뱃사공이 남정네가 아닌 처녀였다. 필시 무슨 곡절이 있겠구나 싶어 내막을 물어보니, 외아들인 오라버니가 입대하는 바람에 부보님을 봉양하기 위해 자매가 번갈아 가며 노를 젓는다는 사연을 듣게 된다. 그리고 몇 해 뒤 이 사연을 노랫말로 지어 작곡가 한복남에게 넘긴다. 1958년에 만들어진 <처녀 뱃사공>은 이듬해에 출시되어 우리가요의 대표성을 지닐 만큼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윤부길은 작사는 물론 희극에도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났다.
1912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하여 성악을 전공했다. 1940년에 콜럼비아 가극단에 입단하여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였고 복화술 연기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첫 희극인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57년에 지병으로 인해 세상을 떴고,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윤항기와 윤복희 또한 인기가수로 우리 가요사에 큰 획을 그었다.
작곡을 맡은 한복남은 가수로도 꽤나 이름을 날렸다.
회식 자리의 단골 메뉴였던 <빈대떡 신사>, <엽전 열 닷 냥>이 그가 가수로서 남긴 히트곡이다. 김정애의 <앵두나무처녀>, 박재란의 <님>, 손인호의 <한 많은 대동강>, 허민의 <백마강>, 황금심의 <양산도 맘보> 같은 굵직굵직한 히트곡을 많이 남겼다. 1919년 평남 안주에서 한영순이란 이름으로 태어나 1991년 영면에 들었다.
가수 황정자는 1927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서 황창순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8살 때부터 유랑극단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주로 민요를 불렀다. 열세 살 때 첫 음반을 발표하였으며 황금심, 이화자와 함께 3대 민요가수로 꼽힌다. 후배 가수인 최정자, 최숙자와는 노래 풍과 이름이 비슷하여 일반인들은 곧잘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많은 히트곡 가운데 특히 병상에서 부른 <노랫가락 차차차>는 그녀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았다. 69년 병마로 인해 세상을 떴다.
*상전벽해 -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라는 뜻으로, 세상일 변천이 심함을 나타내는 말
*개락 – 홍수의 강원도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