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곡은 대중음악의 꽃,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

  • 등록 2024.10.02 11:3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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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의 ‘돌아와요 충무항에’, 김석일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고 조용필 노래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46]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조용필이 새 음반을 낸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스무 번째 노래집이라 한다. 그 소식을 들으니 반갑기는 한데 고개가 갸우뚱해지며 체한 듯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정규앨범이 스무 장밖에 안 되나?’

그가 음반 활동한 세월이 오십 년이 넘었다.

외국의 사례에 비추더라도 그 경력에 스무 장의 독집은 결코 많은 게 아니다. 더군다나 그는 경력 가운데 사십 년이 넘는 세월을 “가왕”으로 추존되어 대중가수의 상징이 되었고, 이십여 년 동안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적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판꽂이에서 그의 음반들을 꺼내 세어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스무 장이 넘고, 내가 알고 있는 것까지 보태면 얼추 서른 장은 더 될 것 같은데 말이다.

 

‘비정규집이 그렇게 많았나?’

기억을 더듬고 자료들을 꺼내 확인해 보니 정말 그렇다.

알게 모르게 독집이 아니면서 조용필의 이름으로 나온 게 열 장이 넘었다. 설령 독집이라 하더라도 외국곡을 개사하거나 번안한 노래를 섞어서 낸 음반은 정규독집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준도 비정규 집 양산의 한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기준 때문에 그의 첫 번째 노래집도 비정규 앨범 판정을 받았다. 그 뒤로 나온 비정규 집들 가운데는 그가 모르게 나온 것도 꽤 여럿일 것으로 짐작된다.

 

조용필이 음악활동을 시작한 건 1968년의 일이다.

고등학생 때 가출하여 8군 무대의 <애트킨즈>라는 컨트리 밴드에서였다 한다. 다음해에 <파이브 핑거스>라는 밴드를 출범시키며 리더의 자리에 올랐고, 그 뒤 타악기의 전설 김대환이 조직한 <김 트리오>에 창단 단원으로 들어가 최이철과 함께 선의의 경쟁으로 실력을 연마했다.

 

일단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기타리스트였지 가수가 아니었다. 평소 그의 노래 솜씨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김대환이 “제1회 플레이보이 컵 쟁탈 그룹사운드 경연대회” 참가 하면서 그에게 보컬을 맡긴 게 조용필이 가수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된다. 그 경연에서 그는 최우수 가수상을 받았고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즈음 조용필은 8군 무대와 일반무대를 오가며 가끔 취입 하였는데, 이때 녹음한 노래들이 나중에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와 시장을 어지럽히는 실마리가 되었다.

 

조용필의 이름이 처음 음반에 새겨진 건 ‘72년의 일이다.

<김 트리오> 시절 <드럼! 드럼! 드럼! 앰프기타 고고! 고고! 고고! 고고!> 음반작업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해 그는 제법 여러 곡을 취입 했는데, 그 가운데 열곡을 추려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이란 표지제목을 달아 내놨다. ‘71년에 녹음한 <돌아와요 부산항(혹은 해운대)에>라든가 여러 외국곡의 번안, 개사곡들은 뒷날 그가 명성을 얻은 뒤에 쏟아져 나오게 된다.

 

여기까지는 들어가는 말이다.

이렇게 서론이 길게 된 데는 조용필이라는 석 자가 가지는 대중음악계에서의 비중이라든가 위상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가 차지하는 무게 역시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조용필의 출세작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건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때 청년기를 보낸, 이른바 70, 80세대라면 더욱 그렇다. 필자 역시 ‘76년 당시에 공교롭게도 부산에 머무르는 관계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인기몰이하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름조차 낯선 가수가 부산에서는 돌풍의 단계를 넘어 태풍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몇 달 뒤 서울로 돌아와 보니 그 태풍은 이미 서울도 휩쓸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가 ’가왕‘의 권좌에 오를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곡가수가 조용필로 알고 있고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노래는 조용필보다 앞서 두 명의 가수가 불렀고, 심지어 조용필 자신도 ‘72년에 취입했었지만, 부른 가수마다 흥행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 여기서 일반대중이 알고 있는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76년 판 이전에 나온 노래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김해일이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에>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황선우가 ‘69년에 만든 작품이다. 작사는 충무 출신 가수인 김해일이 써서 ‘70년에 출시되었다. 음반이 나오자 김해일은 충무시에 들고 들어가 지역홍보 노래로 선정되게 하여 금전적, 행정적 지원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 여세로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그 지역 내에선 어느 정도 알려지는 효과를 얻기도 했다.

 

김해일은 서울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는데, <돌아와요 충무항에>가 나오고 얼마 뒤 스물다섯 나이에 뒤늦은 입대를 하게 된다. 그리고 ‘71년에 휴가를 나왔다가 대연각 호텔 화재 때 화마에 희생당하고 말았다.

그 비극의 슬픔을 못 이긴 유족들은 그의 음반을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버렸다.

 

사진1

 

돌아와요 충무항에

 

꽃피는 미륵산엔 봄이 왔건만                

님 떠난 충무항은 갈매기만 슬피 우네

세병관 둥근기둥 기대어 서서

목메어 불러 봐도 소식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

 

무학새 슬피 우는 한산도 달밤에

통통배 줄을 지어 웃음꽃에 잘도 가네

무정한 부산 배는 님 실어가고

소리쳐 불러 봐도 간 곳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

 

2. 김석일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

 

김해일이 죽자, 작곡가 황선우는 제목과 가사 일부를 바꾼 뒤 자신의 이름을 작사가로 하여 김석일이라는 가수와 조용필에게 준다. 하지만 두 가수의 노래 모두 곧바로 창고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같은 해인 ‘72년에 두 음반이 나왔지만, 김석일의 음반은 ’71년에 취입한 것이 그때 나온 것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뒷날 저작권 소송이 벌어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해 저문 동백섬에 달은 떴는데              

님 떠난 부산항은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소리쳐 불러 봐도 말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님아

 

해 저문 해운대에 달은 떴는데

백사장 해변가에 파도만 밀려오네

쌍고동 울어주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말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부산항에 보고픈 내 님아

 

3.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혹은 해운대)

 

조용필이 남긴 유일한 트로트 창법의 노래다.

반주는 통기타 한 대로만 이루어져 이채를 띤다. 포크와 트로트를 접목하려는 실험적 의도인지 아니면 장난끼인지 모르겠으나 결과는 흥행 실패로 끝났다. 이 곡은 <돌아와요 해운대>로도 알려졌으나 처음 나온 LP음반에는 분명히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표기되어 있다. 다만 작곡가 황선우가 조용필이 소속되어있는 김대환의 <김 트리오>에게 이 곡을 넘길 때 <돌아와요 해운대>라는 제목으로 넘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 노래는 음반으로 나오지 않았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말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님아

 

해 저문 해운대에 달은 떴는데

백사장 해변가에 파도만 밀려오네

쌍고동 울어주는 연락선마다

소리쳐 불러봐도 말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부산항에 보고픈 내 님아

 

4. 조용필의 출세작 ‘76년 판 <돌아와요 부산항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작곡한 사람이나 부른 가수나 모두 매력과 미련을 가진 것 같다. 작곡가인 황선우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가수들에게 이 노래를 취입시키려 애썼고 조용필 역시 미련이 남아 4년 뒤 “안타제조기” 안치행과 손잡고 이 곡을 다시 불러 무명의 설움을 한 방에 날리는 역전 만루 홈런을 친다.

 

대다수 전문가는 이 ‘76년 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삼천만의 합창‘이 된 이유를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 분석한다. ‘75년에 시작된 “조총련계 재일교포 고국 방문사업”에 맞추어 가사 속 2인칭 ’님‘을 3인칭 ’형제‘로 바꾸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 분석은 옳고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가고 싶다. 아무리 시대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가사 몇 마디 바꾸었다고 그렇게 온 나라가 뒤집힐 만큼 생난리가 날까?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꿈의 수치인 백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할 수 있을까? 실제 해답은 편곡에 있다고 본다. 안치행의 별명이 괜히 “안타제조기”이겠는가? 더군다나 그의 옆에는 또 한 명의 편곡천재 김기표(김성철)가 좌장으로 버티고 있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안치행은 처음부터 편곡으로 가요계에 발을 디딘 인물은 아니었다.

‘67년에 그룹 <실버 코인스>의 기타리스트로 들어가 ’71년까지 활동하였고, ‘72년에 <영 사운드>를 결성하여 ’75년까지 이끈 연주인 출신이다. 그 뒤 작사, 작곡은 물론 편곡과 제작에 손을 대면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며 생산자로도 명성을 드날리게 된다. 조용필의 76년 판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 편곡의 걸작이다.

 

조용필 맹목적 추종자들 가운데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조용필이 편곡한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논거가 아주 희박한 이야기일 뿐이다. 지문은 손가락에만 있는 게 아니다. 목소리에도 있고, 연주에도 있고, 악보에도 있다. 이 ‘76년 판에는 확실한 안치행 지문이 느껴지고 있고 그의 체취가 강하게 난다. 그에게는 대중의 마음을 훔치는 동물적 본능이 있다. 그 본능은 때론 색깔로, 때론 냄새로, 때론 데자뷰로 나타난다. 리듬과 악기 편성과 노래구조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안치행 표다.

 

또 하나의 증거로는 음반에 “안치행 편곡집”이라고 활자로 똑똑히 새겨져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아마 그 주장은 ‘80년에 나온 정규 1집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착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76년 판<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대성공을 거두자, 작사ㆍ작곡가로 등록된 황선우는 언론과 가요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일약 스타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이 때문에 뒷날 톡톡히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원곡가수인 김해일의 어머니가 저작권 소송을 낸 것이다. 결과는 원고 일부승소로 판결이 났고, 황선우는 합의금을 주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여기서 황선우의 주장 또한 전혀 터무니없는 것 같지는 않으니 한 번 들여다보기로 한다.

 

문제의 작품은 애초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제목으로 썼다고 한다. 그런데 김해일이 충무시로 부터 지원금을 받을 수 있으니, 자신에게 달라고 간청하여 준 것이고, 김해일이 가사를 바꾸고 작사자도 그의 본명인 김성술로 해서 음반을 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판결에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필자는 “어째서 ‘76년 판 조용필 음반이 정규앨범으로 인정받지 못하느냐?”는 가요 팬들의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 까닭을 밝히자면 이렇다. 표지에는 조용필 이름과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으나 조용필 노래는 앞면에만 들어있고 뒷면은 <영 사운드> 노래로 채워져 있어서 그렇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72년에 나온 그의 첫 번째 음반은 앞뒤 10곡 모두 조용필 노래로 구성되어 있으나, 창작곡이 절반밖에 안 되는 다섯 곡이고 나머지는 외국곡을 번안, 개사한 곡들이라 정규1집의 지위를 놓치고 말았다.

 

사실 조용필 같은 초일류 가수에 관한 글을 쓰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 뒷얘기도 방대하리만치 많지만, 지켜보는 눈과 귀도 많아 바짝 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논제는 “편곡”에 있으니, 논제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조용필 얘기를 다루었다. 뒷날 조용필 노래를 다시 소개할 때 더 자세히, 더 많이 나누기를 기약한다.

 

 

 

 

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ccrks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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