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난번 우리는 1898년 어느날 백정 박성춘(1862-?)이 종로에서 열린 대규모 민중 대회에서 개막연설을 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박성춘은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요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우선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는 박성춘 말고도 상인 등의 하층계급이 요인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백정 출신(해방된 백정)으로서는 박성춘이 거의 유일한 요인이었던 것 같다. 당시 활동을 주도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서재필ㆍ윤치호ㆍ이상재ㆍ지석영ㆍ주시경ㆍ오세창ㆍ이승만ㆍ안창호ㆍ이승훈ㆍ남궁억ㆍ정교ㆍ이준ㆍ장지연ㆍ박은식ㆍ이동녕ㆍ신채호ㆍ한규설ㆍ이동휘 등이다. 당시 제도적으로는 신분제도가 철폐되었지만, 실제에 있어선 백정이 교육받거나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박성춘은 어떻게 쟁쟁한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아들 박서양의 효성이 촉매가 되었다.
교육을 받지 못한 박성춘은 아들에게만큼은 저주스러운 운명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천지 어떤 학교가 백정의 자식을 받아 줄 것인가? 번민에 번민을 거듭한다. 정규 학교는 보낼 수 없으므로 당시 천주교가 세운 학교를 보내려 한다. 그러나 학비가 없다. 한데 개신교의 주일학교에서는 학비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박성춘은 아들을 무어 목사(S.F.Moor, 한국 이름 모삼열-牟三悅이 세운 학교에 보낸다. 이 학교에 다닌 아들 ‘서양’은 후에 세브란스 의학교를 나와 의사가 될 것이다.
1894년 콜레라가 창궐한다. 박성춘이 걸려 사경을 헤맨다. 아들 서양이 무어 목사에게 도와 달라고 하소연한다. 무어 목사는 친분이 있는 의사 애비슨(O.R. Avison)에게 부탁한다. 당시 애비슨은 국립병원 제중원 의사였다. 애비슨은 종로 관자골 박성춘 집을 몇 달간 왕진하면서 정성껏 치료한다. 박성춘은 완치된다. 당시 애비슨은 고종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임금의 주치의가 자기와 같은 천민을 그토록 정성껏 치료해 준 데 대하여 박성춘은 눈물 어린 감동을 한다. 나아가 그는 무어 목사와 애비슨의 감화로 기독교 신자가 된다.
박성춘은 무어 목사가 1893년에 세워 선교하고 있던 곤당골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 처음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다녔다. 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신분을 밝히자, 교회 신자들이 크게 반발했다. 상놈이나 종들과는 같이 교회를 다닐 수 있으나 백정과는 다닐 수 없다고 교인들은 항의한다. 무어 목사는 기독교가 양반만을 위한 종교가 아님을 설득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교인들은 곤당골 교회를 떠나 홍문동(서울 종로 광교)에 새로운 교회를 세운다. 그 뒤로 곤당골 교회는 백정의 수가 늘게 된다. 1898년 박성춘이 연설하던 그해 기준으로 108명의 교인 가운데 30명이 백정이었다.
박성춘은 교회에서 교육받고 정신을 깨칠 수 있었다. 그는 신분 철폐를 위하여 떨치고 일어난다. 1895년 그가 정부에 보낸 탄원서의 일부다.
“우리는 500년 남짓 백정 일을 생활의 수단으로 삼아 왔습니다. 매년 제사 때마다 조정의 요구에 응해 왔지만, 대가를 받은 적은 없으며 가장 천대 받은 칠천민(七賤民: 기생ㆍ무당ㆍ광대ㆍ포졸ㆍ갓바치ㆍ고리장ㆍ백정) 중의 하나로 취급받아왔습니다… 더구나 삼척동자까지도 우리에게 반말을 하니… 수없는 천대를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 우리보다 낮은 계층인 광대조차도 갓과 망건을 쓰는데 우리만 유독 허용되지 않으니 그 한이 뼈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소를 잡는 백정이 천한가, 백성을 잡는 권력자가 천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