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시대의 나라 살림은 농업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세계적으로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나 축산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이후 서양은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따른 통상이 활발해지게 되었고 동양은 세계사적으로 뒤처지는 역사를 맞게 되었다. 왕권제도 시대에 세종은 재해가 일어나거나 농사가 어려워지거나 먹고 사는 민생이 어려워졌을 때인 ‘민생가려’의 경우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자.
평시에는 논과 밭을 새로 일구고 저수지 등을 확충하여 경기도를 빼고서도 태종 4년(1404)에서 25년 뒤인 세종 초기 때 642,352결이 늘어나 그 증폭이 배에 이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호수와 사람도 각기 27,607호, 319,339구가 늘어났다.
이와 같은 밭과 호수와 사람의 증가는 토지의 개간, 인구 자연증가의 영향도 있겠지만, 불과 25년 만에 거의 배에 달하는 토지의 개간과 호구에서 자연증가가 가능했다고 믿기지 않는다. 이것은 곧 나라가 직접 지배하는 토지의 증가 ‧ 호구의 증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곧 이러한 증가는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 추진되었던 집권적 통제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라의 수세지(收稅地, 특정한 개인에게 조세징수권을 넘겨준 땅)와 부역 동원의 대상자를 적극적으로 파악했던 결과일 것이다.(정두희, 《왕조의 얼굴》, 서강대학교출판부, 2010, 178~179쪽)
그러면서 장마나 가뭄 그리고 질병 등의 재해가 오면 처음으로 하는 일은 피해지역 조사에 들어갔다. 그다음은 해당지역의 ‘조세감면’이 이어졌다. 그리고 문소전과 그 밖의 지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는 민심을 달래는 행위였을 것이다. 이어 각 부처의 경비를 절감하는 것에 더해 죄수도 방면하였다.
* 죄수 석방
"봄으로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 여러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백성의 살아갈 길이 염려가 된다. ‘民生可慮’ 혹시나 원통한 옥사(獄事)가 있다면 참으로 측은한 일이니, 불충한 죄와 불효한 죄를 빼고 유배보내는 벌 이하는 기결이거나 미결이거나 모두 다 용서하여 석방하게 하라." 하였다.(⟪세종실록⟫2/4/8)
불효나 불충한 중죄인을 제외하고는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다음으로 이어진 건 각 부서의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물품의 수납을 조절하는 일이었다.
* 수납 조절
(유민이 늘어 수납할 것을 조절하게 하다) 호조에 전지하기를, "강원도는 해를 거듭하여 농사에 실패하여 사람들이 떠돌아다니니 민생이 염려된다. ‘民生可慮’ 각 고을의 공안(貢案, 공물의 품목ㆍ수량을 적던 장부)에 기재된 공물은 관아에 명하여 1년동안 지출할 것과 현재의 수량을 계산하여 갑진년에 수납할 것을 적당히 줄여주도록 하라."하였다.(⟪세종실록⟫ 6/8/21)
(가뭄 탓으로 충청ㆍ전라ㆍ경상의 상납을 금하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와 경기좌도의 각 고을은 가뭄으로 인하여 곡식이 말라 죽어 추수의 희망이 이미 끊어졌으므로, 백성의 생계가 염려스럽사오니 ‘民生可慮’, 그 올해에 바칠 세금은 모두 경감해 주소서. 또 전례에 해마다 가을철에는 충청도의 쌀을 서울로 운반하여다가 백관에게 봄 첫 달의 녹봉(祿俸)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지금은 이른 가을인데도 백성의 식량이 매우 어렵사오니 상납(上納)하지 말게 하시고, 내년 봄 첫 달의 녹봉을 요량하여 감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18/78)
이어 세종 22년 4월 24일에는 가뭄으로 공사 간의 부채 추징을 연기했다.
⋅세종 22년 5월 4일에는 가뭄으로 문소전(조선 태조ㆍ신의왕후의 혼전) 이외의 각 전 진상은 금하게 했다.
⋅세종 25년 7월 17일에는 가뭄으로 인하여 각도의 특산물 및 별도의 진상을 금했다.
⋅세종 25년 7월 23일에는 진상하는 물건과 상납하는 공물을 감하라 명한 것을 엄중히 시행할 것을 각도 관찰사에게 명했다.
⋅세종 25년 9월 21일에는 흉년으로 인해 함길도에 문소전의 소선(素膳, 경복궁에 있었던 조선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당) 궁궐건물ㆍ종묘와 천신(薦新, 새로 농사지은 과일이나 곡식을 먼저 사직이나 조상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드리는 의식) 이외의 진상을 금하게 했다.
⋅ 세종 25년 9월 22일에는 평안ㆍ함길도 도절제사에게 바치는 송골매· 퇴곤(매의 한 종류)과 빛깔이 다른 매 말고는 진상을 금하게 했다.
* 음주 금지
이어 구체적으로 백성들의 먹거리에도 비상이 걸렸는데 술 마시기를 금할 정도에 이르렀다. 가뭄이 심해지자, 나라의 제사와 사신 접대의 일을 빼고는 음주를 금하게 했다. 술 자체보다 사회적 분위기를 더욱 걱정했을 것이다. 이런 풍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나라에 우환이 있을 때 지금도 근신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어제 가뭄으로 말미암아 정치에 간절한 말을 구하였더니,... ‘배를 타는 일은 괴로운 일이니 마땅히 벼슬을 주어 수고함을 위로하여야 한다’라는 등 이 같은 요긴하지 않은 말이 꽤 많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간절하고 요긴한 말이 없었으니, 경들은 ... 백성들이 마음으로 기뻐할 만한 민생에 요긴하고 간절한 말을 진술하도록 하라.” 하니, 좌의정 이원이 아뢰기를, "여러 곳에 기우제를 지내는 일만은 늦출 수가 없사오니 ... 어느 신령에게든지 모두 빌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하고, 영돈녕 유정현은 아뢰기를, "음기(陰氣)를 내게 하고 양기(陽氣)를 막는 뜻으로, 조회에 음악을 끊는 것도 두려워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하는 일까지 하나이다." 하였다. (⟪세종실록⟫7/6/16)
⋅세종 15년 12월 7일 : 예조에 전지하기를, "각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의 생활이 염려된다. 약(藥)으로 복용하기 위한 것 말고는 술을 사용하지 말라." 하였다 (세종 15/12/7)
⋅세종 17년 5월 1 : 민생가려‘民生可慮’이니 제향과 진상, 사신 접대 이외의 술 사용을 금하다.
⋅ 세종 18년 4월 17일 : 흉년으로 민생가려‘民生可慮’이니 금주령을 내리다.
⋅ 세종 18년 4월 27일 : 비가 내렸으나 흡족하지 않아 민생가려‘民生可慮’이니 술을 마시지 않다.
⋅세종 26년 2월 27일 : 지난해 곡식이 흉년들어 조정과 민간이 먹기 어려우니 모든 제향과 각궁에 진상하는 것과 이웃나라 사람의 접대 말고는 술을 금하다.
세종은 가뭄, 홍수 등 재난이 있을 때는 여러 사람에게서 여러 의견을 구하고 단계적으로 여러 대비책을 세우고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