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마 전에 고교동기 단톡방에 김창현이 동기 친구가 최근 쓴 책을 소개한다며 이철우 박사가 쓴 책 《수치심 잃은 사회》 보도자료를 올렸습니다. 보도자료에 따르하면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이철우 박사는 동경대에서 인간의 가치관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병치레 속에서도 인간 심리와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을 놓지 않았던 이 박사는 최근 갈등의 심리 구조와 감정의 메커니즘에 주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철우? 철우라면 고3 때 같은 반 친구였던 것 같은데?” 내가 이렇게 단톡방에 올리니까,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채백이 맞다며, 이철우가 10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하는군요. 거동이 불편한 이철우는 슬기말틀(스마트폰)에 음성 녹음하면 이를 글로 바꿔주는 앱을 사용하여 이 책을 냈다고 합니다. 철우는 이미 그동안 《행복을 훈련하라》, 《나를 위한 심리학》, 《세상을 움직이는 착각의 법칙》, 《사랑하고 싶은 스무살, 연애하고 싶은 서른살》, 《관계의 심리학》 등 이미 많은 책을 냈더군요. 저는 같은 반 친구였던 철우에 대해 너무 무심하였음을 반성하면서 즉시 책을 주문하였습니다.
도착한 책을 펼칩니다. 거동이 불편한 철우가 온 힘으로 책을 냈다고 생각하니, 책을 펼치는 제 마음도 엄숙해집니다. 철우는 머리말에서 을사늑약 때 자결한 민영환의 예를 들며, 오늘날 정치인과 관료 집단에서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람이 과연 있겠냐고 묻습니다.
민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치심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정치인과 관료 집단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랍니다. 그들에게는 공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데서 오는 수치심은 이미 희미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 보니 이들은 잘못을 저질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심지어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에서도 남 탓만 하며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오래전 공직에 몸을 담았던 저로서도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신랄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수치심을 잃어버린 요즘 공직사회에서 얼굴 붉힐 사람이 얼마나 있으려나? 철우는 수치심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 하나의 상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적 기준의 붕괴이며, 건강한 공동체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철우는 우리가 잃어버린 이 소중한 감정 하나를 되찾고자, 무너져가는 우리 사회의 뼈대를 다시 굳건하게 세우는 첫걸음이 되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
차례를 보니 철우는 1장에서 수치심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2장에서는 수치심이 없는 풍경들을 보여줍니다. ‘갑질의 끝, 죽음으로 내몰린 교사들’, ‘침묵의 고속도로 – 양평고속도로 변경 미수 사건’, ‘새만금 잼버리 – 국가의 무능이 드러난 순간’, ‘50억 클럽 – 법조 권력의 부패와 수치심 실종’ 제목만 보아도 수치심 없는 풍경이 어떠한지 짐작하겠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수치심이 어떻게 붕괴하였는지 보여줍니다. ‘이명박 정권 – 통치의 효율 앞에 사라진 수치심’, ‘문재인 정권 – 선한 얼굴 뒤에 숨은 위선과 내로남불’, ‘윤석열 정권 – 수치심의 총체적 붕괴’ 이 역시 제목만 보아도 역대 정권에서 수치심이 어떻게 붕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뒤이은 4장에서는 수치심은 왜 무너졌는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진영논리가 수치심을 마비시킨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이런 심각한 진영논리에 빠져있다는 생각에 4장을 읽으면서는 더욱 크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5장에서는 수치심을 사라지게 한 부수적 요인들을 얘기하는데, 이 역시 제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주의와 성공 지상주의’, ‘왜 나만 갖고 그래? - 허위 일치 효과“, ‘나르시시스트의 급증과 수치심의 실종’,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정부, 나르시시스트 정권’이 5장의 소제목들입니다. 그 가운데 허위 일치 효과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해야겠군요. 철우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돈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러한 믿음은 전과 14범인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면서 굳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편법과 부정이 발각되더라도 ”다들 그러고 있는데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변명으로 일관한다고 합니다.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방어막 치는 사람들의 이러한 착각을 사회심리학에서는 ‘허위 일치 효과’라고 한다는군요. 나르시시스트에 대해서도 좀 더 설명한다면, 스스로 존대하고 타인에게도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시쳇말로 ‘관종’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철우는 정권 차원에서 윤석열 정부가 성과를 부풀리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데서 나르시시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철우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든 법조계(6장), 사회 도처의 몰염치(7장), 디지털 시대의 몰염치(8장)를 보여줍니다. 특히 법조계의 몰염치를 독립된 장으로 특별히 할애하여 설명한 것에 대해 법조인인 저로서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철우는 법조계야말로 수치심이 살아 있어야 할 마지막 공간이라고 힘주어 말하는데, 그렇기에 수치심을 잃은 법조계를 독립된 장(章)으로 더욱 강조한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법조계야말로 수치심이 살아 있어야 할 마지막 공간이어야 하는데, 요즘 왜 그리 날뛰는 법기술자, 법비(法匪)들이 많은지...
철우는 6장에 올린 글 가운데 <법조인들은 왜 수치심을 잃었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법조인들의 선민의식을 꼽습니다. 스스로 ‘선택받은 사람들’로 착각하는 법조인들에게 국민이 동등한 존재로 보일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선민의식이라... 혹시 저 자신에게도 그러한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예전에 어느 고위 행정관료가 국민은 개, 돼지라고 발언했던 적이 있지요? 법조인, 관료, 정치인들이 국민은 단지 부림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수치심을 잃고, 그래서 이런 몰염치가 전 사회로 퍼져나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철우는 마지막 9장에서 ‘다시 수치심을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몰염치에 빠진 우리 사회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에 대해 말합니다. 철우는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말을 한 번 삼키는 일 등 작은 것 하나부터 실천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작은 부끄러움을 존중하자고 합니다. 작은 부끄러움은 결국 더 큰 실수를 막아주는 내면의 제동장치가 된다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타인을 통해 배우기’,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부끄러움을 나누는 사회 만들기’ 등의 제목으로 다시 수치심을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시선’이 되어야 한다면서, 시선이 되는 방법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무관심을 거부하기 : 타인의 몰염치를 봤을 때 외면하지 않는 것. 침묵이 가장 큰 동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모범이 되기 : 내가 먼저 규칙을 지키고, 내가 먼저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작은 용기 내기 : 부당한 일 앞에서 조용히라도 문제 제기하는 것, 잘못된 행동을 묵인하지 않는 것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 만들기 : 비판이 아니라 존중하는 시선으로, 서로가 서로를 감싸고 지키는 공동체를 만들자.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수치심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거대담론으로만 움직이면 말만 요란할 뿐이지 현실의 변화는 더디옵니다. 철우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창한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작은 부끄러움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철우 말대로 작은 것 하나부터 실천해 나갑시다. 마지막으로 철우의 염원이 담긴 말을 인용하면서, 《수치심 잃은 사회》를 본 제 소감을 마칩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실수했을 때는 사과하고, 잘못한 줄 알았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어색하지 않은 사회, 그럴 때 비로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다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윤리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부끄러움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작은 용기이며, 가장 위대한 저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