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어제 상해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밤늦게 돌아왔다. 오늘 새벽 머리맡에 흩어져 있는 몇 권의 책 가운데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펼쳐보았다. 단재와 가깝게 지냈던 안재홍의 서문을 다시 읽어 본다. 폐부를 울린다. 여기 일부를 옮긴다. 약간 쉬운말로 바꾸어 옮긴다.
단재 신채호는 구한말이 낳은 천재적 사학자이자 열렬한 독립운동가다. 그 천성의 준열함과 식견의 예리함은 세속의 무리가 따를 수 없었던고, 사상의 고매함은 홀로 속세를 한 걸음 벗어났다. 그의 《조선상고사》는 그가 남긴 책 가운데서 가장 이채로운 것이다.
그는 이미 약관의 나이에 사상혁명과 신도덕 수립에 뜻을 세운 바 있었다. 마침, 5천 년 조국의 명맥이 날로 기울어가고 백성들의 울분은 걷잡을 수 없었던 때였다. 서울의 평론계에 나선 단재는 억누를 수 없는 북받쳐 오르는 청열(淸熱)을 항상 한 자루 붓으로 사회에 드러냈고, 이로써 민족의 심장을 쳐서 움직였다.
그가 주필로 있었던 ‘황성일보’와 ‘대한매일신보’는 아마 그의 청년시대에 마음의 집으로 삼고 살았던, 꺼지지 않는 꿈의 자취라고 할 것이다.
그는 국정의 득실(得失)을 통렬히 논파하였고, 당시 인물들의 장단(長短)을 어김없이 밝혔다. 그는 당시 사상의 더러움과 도의의 타락에 분개하여 그 병인이 국가의 역사가 바로 서지 못함과 민족정기가 두드러지지 않음에 있음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이 선비들의 역사 왜곡과 가치의 전도(轉倒)와 시비의 착오에 있음을 역설하였다. 이리하여 단재는 엄연히 당시 국민사상 개혁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는 계속 쓰는 정치평론 말고도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쓰고 <을지문덕>을 쓰고 최영장군 전기를 쓰고 이순신전을 쓰고 이태리건국 삼걸전도 썼다. 때때로 그는 한시나 읊조리는 인사들의 고루한 견해를 논박하였는데, 이 모든 것을 민족의식의 세련과 앙양에, 국풍의 진작과 선양에 그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온몸으로써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 버티고 섰었다. 그러나 넘어가는 큰 집을 그 혼자 몸으로 지탱해 낼 수는 없었다. 무술년 일제의 끝없는 야망이 드디어 반만년 조국을 통째로 삼키려는 것을 차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맨몸으로 표연히 조국을 떠나면서 가느다란 지팡이 하나로 가을바람을 맞으며 압록강을 건넜다.
이로부터 혹은 만주로 혹은 시베리아로 찾아다니느라 사시랑이(가늘과 약한 사람이나 물건)의 생애에 안주할 줄 몰랐다. 혹은 블라디보스톡의 한국 교포와 함께 석판(石版)으로 신문사를 경영하기도 하고, 혹은 유랑하는 독립투사와 함께 신발 끈을 둘러매고서…. 빈곤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고 세상사는 가시덤불처럼 거칠어만 갔다. 아프고 한 많은 삶의 연속이었다.
북경의 여관에서 남경과 상해의 골목에서 모진 추위, 호된 더위 속에 그 맵고도 날카로운 비판의 눈을 부릅뜨면서 긴 한숨, 짧은 걱정, 높은 꾸지람, 나직한 군소리에 비바람, 눈서리 뜨고 지는 해와 달, 열 해, 수무 해 거푸 거듭 지나는 동안 기미운동이 터지고 임시정부가 나타나고, 독립신문이 간행되었다. 단재는 득의의 붓대를 고쳐 잡고 민중의 마음 거문고를 켕기고, 퉁기고, 울리고 곁들이어, 높고 웅숭깊은 소리 천하에 들리게 하기를 또 수년이나 하였다.
원래 천성이 너그럽지 못하고 가부(可否)가 분명한 그였는지라 맡겨오는 붓(신문사의 주필 잘나 글 부탁)을 스스로 던져버리고는 다시 연경의 누추한 골목과 몽골의 두메(한자말 ‘오지’)와 진(晉)나라, 송(宋)나라 등 옛 나라를 돌아다니느라 한갓 나라 밖 망명의 슬픔만을 절절히 간직한 채 고향 그리는 정은 일으킬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정부주의 조직에 간여하여 교활한 일본 경찰의 손에 붙들리게 되었다. 여순감옥에 10년이나 구금당하였다가, 마침내 수의(囚衣)도 벗지 못한 채 적국 간수의 싸늘한 눈길 속에서 다시는 못 돌아올 길을 떠났으니, 그날은 병자년(1936년) 2월 21일 오후, 유한(遺恨) 깊고 깊은 잊지 못할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