뜯기지 않은 《훈민정음》을 찾아라!

2013.05.18 11:03:17

[나만 모르는 한글이야기 2] 《훈민정음》, 세상에 얼굴내밀기

 [그린경제=김슬옹 문화전문기자] 1443년에 세종이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한 최초의 한글 28자는 언제 어디서 처음 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까?  한글이 단지 우리의 문자라서가 아니라 한글 창제는 인류 문자의 대혁명이었기에 더욱 궁금하다. 유감스럽게도 세종이 최초로 드러낸 28자의 실체는 제대로 규명되어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세종은 1443년 음력 12월에 28자를 창제하였다. 물론 이 때는 문자 창제에 성공하였지만 그것을 세상에 정식 공표한 단계는 아니었으므로 일부 미진한 점이 있을 수 있다. 세종이 돌아가신 뒤 편찬하여 발간한 세종실록은 전대미문의 이 놀라운 사건을 한자 단 58 자로 기록하고 있다. [사진 1]
 
   
▲ [사진 1]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1443년 12월 30일자 실록 기록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世宗莊憲大王實錄卷第一百二終"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_ 온라인판 조선왕조실록 번역본
 
이 기록은 1차 사초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지만 세종 사후의 편집에 의해 공표된 것이므로 1차 사초를 다듬은 기록이다. 1차 기록인 세종 때의 승정원일기가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져 더 이상의 진실을 밝혀내기는 어렵다.
 
다만 이 때의 진실을 14469월 상순에 펴낸 훈민정음 문자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에서 정인지가 보충 설명을 하고 있다.
 
"癸亥冬.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二氣之妙,莫不該括.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簡而要,精而通."   _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것을 들어 보여 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옛글자처럼 모양을 본떴지만, 말소리는 음악의 일곱 가락에 들어 맞는다. 천지인 삼재와 음양 이기의 어울림을 두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스물여덟 자로써 전환이 무궁하여, 간단하면서도 요점을 잘 드러내고, 섬세한 뜻을 담으면서도 두루 통할 수 있다."  _  김슬옹 표준 번역 시안
 
28자와 그것을 간단하게 설명한 예를 세종이 측근 신하들에게 공표한 것이다. 그 실체는 1446년 상순에 발간한 ≪훈민정음≫에 기록되었고 이것이 28자가 이 세상에 처음 드러난 기록인 셈이다. [사진 2, 3, 4]
  
   
▲[사진 2] “훈민정음” 해례본 첫째 장 보사 복원본
  
   
▲[사진 3] “훈민정음” 해례본 둘째 장 복원본

   
▲ [사진 4] “훈민정음” 해례본 셋째 장 복원본

그러므로 28자는 모두 세종 서문과 예의에 해당되는 모두 세장, 7쪽에 걸쳐 소개된 셈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중 4쪽은 세종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훗날 복원한 기록이다. 세종이 직접 펴낸 초간본은 오랜 세월 묻혀 있다가 1940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용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책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이용준으로부터 사들여 지금은 간송미술관(서울 성북구 소재)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이 책은 발견 당시 두 장, 총 네 쪽([사진 2, 3])이 찢겨 있었다. 세종의 서문과 스물여덟 자가 모두 보이는 네 쪽 사진 가운데 [사진 2], [사진 3]은 원본과 같게 복원한 것이고, [사진 4]는 지저분하게 보이는 원본([사진 5])를 다듬어 복원한 것이다. 맨 끝의 [사진 6]은 간송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원본 사진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상주본 역시 이 부분이 뜯겨 있기는 마찬가지다.
 
   
▲ [사진 5] ≪훈민정음≫ 해례본 셋째 장 사진본
  
   
▲ [사진 6]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 ‘용자례
 
찢긴 네 쪽을 누가 어떻게 복원했는지는 역사의 미스터리다. 왜냐하면 훈민정음 해례본을 최초로 발견하고 이것을 간송에게 넘긴 이용준이 북으로 이주하여 몇 년 전에 사망하였고 그 어디에도 관련 기록이나 증언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간송본의 4쪽까지가 정말 복원한 것이라면 어떻게 복원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실록 때문에 가능했다. 14469월에 펴낸 ≪훈민정음≫ 가운데 세종 서문과 예의, 그리고 정인지 서문을 사관이 실록에 재수록하였기 때문이다. [사진 7]
  
   
▲ 세종실록에 재수록한 ≪훈민정음≫ 서문과 예의
 
세종은 ≪훈민정음≫ 책을 목판본으로 펴냈다. 몇 권을 찍었는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용비어천가550권이나 찍어 펴낸 세종이고 보면, 또한 목판본은 활자본에 비해 빠르게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있으므로 적지 않은 책을 인쇄해서 널리 알렸을 것이다. 세종은 훈민정음 시험을 과거시험에까지 도입하였으므로 발간 책의 양에 관한 그런 추론이 가능하다.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또 발견된 것(상주본)을 보면, 뜯기지 않은 온전한 훈민정음 해례본이 그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8자 창제와 반포는 문자혁명이자 지식혁명이며 모든 계층의 소통혁명이었기에 이에 대한 역사의 상상이 즐거우면서도 경외롭기까지 하다
  
[그린경제/한국문화신문 얼레빗=김슬옹 문화전문기자]

 

 
 
** 김슬옹:
한글학회 연구위원, 세종대 겸임교수, 한글문화연대 운영위원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지은이

김슬옹 기자 tomul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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