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 세종 단독작품일까?

2013.05.26 17:00:46

[나만 모르는 한글이야기] 한글 창제를 둘러싼 논란과 진실

[그린경제=김슬옹  문화전문기자]  올해는 한글 창제 570돌이요 반포 567돌이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 탄신 616돌이기도 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상당수의 현직 국어 선생님들조차도 한글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창제한 것으로 알고 있고 또 현장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물론 학계에서도 일부이기는 하나 집현전 협찬설이 맞서 있기는 하지만 훈민정음 전공 학자 가운데 친제설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협찬설은 ‘-설’조차 성립하기 어려운 매우 불합리한 의견이다. 

협찬설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인 냥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두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그렇게 놀라운 거대한 문자 창제를 어찌 개인이 혼자 할 수 있느냐는 것이며 또 하나는 민중사관에 의해 영웅주의 사관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런 혐찬설이 굳어졌다.
 
협찬설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 보나 훈민정음 관련 학문적, 맥락적 진실로 보아서도 성립하기 어렵다. 한글은 언어학뿐만 아니라 철학, 음악, 수학 등 다양한 관련 학문에 정통한 천재가 지속적인 오랜 노력 끝에 만들 수밖에 없는 문자다. 오히려 공동 연구로는 창제하기 어려운 문자다. 집현전 학자들의 참여는 창제 이후에 새 문자를 널리 보급하기 위한 후속 작업을 도운 것이다. 그러한 놀라운 천재를 영웅이라 한다면 영웅주의 사관으로 볼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물론 세종이라는 천재, 영웅으로 하여금 새 문자를 만들게 한 강력한 추동력은 민중 교화에 있으므로 민중이 간접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세종 친제설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어느 날 세종이라는 대 천재가 하늘에서 떨어져 혼자서 이 엄청난 발명을 해치웠다는 것은 아니다. 정답은 역사가 세종을 만들었지만 세종은 훈민정음을 통해 그 역사를 다시 썼다는 것이다. 세종이 아무리 대천재성을 타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조선왕조의 개국과 왕의 신분으로서의 위치가 아니었다면 창제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세종을 만들었다는 맥락과 세종이 단독으로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은이도 대학 시절에는 1446년에 세종이 여덟 명의 공저자와 함께 직접 펴낸 <훈민정음>(해례본)의 다음과 같은 표현을 신하들의 헌사 정도라면 여긴 적이 있다.
 
(1) 아아, 정음이 만들어지매 천지 만물의 이치가 모두 갖추어지니, 참 신기한 일이구나. 이는 아마도 하늘이 성스러운 임금님(세종)의 마음을 열으사 그 솜씨를 빌려 주신 것이로구나!(旴.正音作而天地萬物之理咸備,其神矣哉.是殆天啓聖心而假手焉者乎.)-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
 
(2) 공손히 생각 하옵건대 우리 전하는 하늘이 내린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베푸신 업적이 모든 왕들을 뛰어 넘으셨다.(恭惟我殿下,天縱之聖,制度施爲超越百王.)_정인지 서문
 
(3)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무릇,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이루는 큰 지혜는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음이다(夫東方有國,不爲不久,而開物成務之大智,盖有待於今日也歟.)-정인지 서문 
 
그야말로 왕조 시대에 용비어천가식 찬사와 찬미, 지은이가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민중사관에 사로잡혀 위와 같은 표현은 당연히 문학적 수사나 의례적 헌사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훈민정음을 연구하면 할수록 위와 같은 표현에는 단 1%의 과장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세종이 직접 한글을 창제했다는 열 가지 근거나 이유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세종이 직접 밝힌 역사적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은 그가 직접 지은 서문에서 자신이 직접 창제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4)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新制二十八字,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_세종 정음 서문) 
 
둘째 근거는 한글 창제 사실을 최초로 알린 세종실록 기록에서 세종 친제 사실을 다음과 언급하고 있다.
 
(5)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것을 들어 보여 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옛글자처럼 모양을 본떴지만, 말소리는 음악의 일곱 가락에 들어 맞는다. 천지인 삼재와 음양 이기의 어울림을 두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스물여덟 자로써 전환이 무궁하여, 간단하면서도 요점을 잘 드러내고, 섬세한 뜻을 담으면서도 두루 통할 수 있다.(癸亥冬.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二氣之妙,莫不該括.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簡而要,精而通._<훈민정음> 정인지 서문.
 
비록 간략한 기록이지만 그 정황의 진정성이 잘 드러나 있다. 위와 같은 기록의 진실성은 신하들의 증언인 세 번째 근거로 이어진다.
 
(6) 임금께서 친히 1443년 12월에 28자를 창제하여 예와 뜻을 보여주고 훈민정음이라 불렀다.(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훈민정음>(해례본) 정인지 서문
 
앞에서 둔 (1), (2), (3)의 기록도 이와 같은 신하들의 증언 기록에 속한다. 이런 신하들의 기록은 한글 반포를 반대했던 최만리 반대 상소문에서도 드러난다. 네 번째 근거다.
 
(7) 신 등이 엎디어 보건대, 언문을 만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여, (임금께서) 새 문자를 창조하시는데 지혜를 발휘하신 것은 전에 없이 뛰어난 것입니다. (臣等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夐出千古)-세종실록 1444년 2월 16일
 
한글 창제 사실을 공표한 지 얼마 안 돼 제출된 반대 상소에서도 임금(세종)의 신기한 창조물임을 인정하고 있다.
 
다섯 번째 근거는 세종이 새 문자를 창조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8) 비록 세상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법률문에 의거하여 판단이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저지른 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법률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서 민간에게 반포하여 보여,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어떻겠는가?(雖識理之人, 必待按律 然後知罪之輕重, 況愚民何知所犯之大小 而自改乎? -<세종실록> 세종 14년(1432) 11월 7일자.
 
(9)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 책을 비록 나누어 주었을지라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역시 어찌 그 뜻을 알아서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리오. 내가 《주례(周禮)》(중국 12세기 때 편찬된 유교 경전, 세종 때 단행본으로 출판됨)를 보니, ‘외사(外史, 벼슬 이름)’는 책 이름을 사방에 펴 알리는 일을 주관하여 사방의 사람들로 하여금 책의 글자를 알게 하고 책을 능히 읽을 수 있게 한다’ 하였으므로, 이제 이것을 만들어 서울과 외방에 힘써 가르치도록 하라.(上曰: “三綱, 人道之大經, 君臣父子夫婦之所當先知者也。 肆予命儒臣編集古今, 幷付圖形, 名曰《三綱行實》, 俾鋟于榟, 廣布中外, 思欲擇其有學識者, 常加訓導, 誘掖奬勸, 使愚夫愚婦皆有所知識, 以盡其道, 何如?-세종실록, 세종 16년(1434) 4월 27일자.
 
책을 통한 교화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은 이미 한글 창제 11년부터 아주 구체적인 문자에 대한 고민을 내보이고 있다. 한자나 한문의 문자로서의 모순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이두건 만화를 병행하는 책이건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고 세종은 새로운 문자를 구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섯 번째 친제 근거는 바로 한글 창제 과정은 비밀 프로젝트였고, 그 주체는 임금이 될 수밖에 없다. 공동 연구라면 비밀 연구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쉬운 문자를 통한 교화에 대한 세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1432년, 1434년 기록의 사실성, 그리고 그 이후로 이에 관한 기록이 안 나오다 1443년 12월에 와서야 창제 사실이 드러난 점 등은 바로 한글 창제 과정이 철저한 비밀 프로젝트였음을 보여 준다. 사대부들의 반발과 고도의 집중 연구가 필요한 연구였으므로 세종은 당연히 비밀리에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일곱 번째 근거는 한글 창제는 임금이 단독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강력한 창제 의지와 그것을 떠받들 수 있는 뛰어난 지식과 아이디어가 함께 가능한 일이었다.
 
여덟 번째,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에 의해 창제된 것이 아니라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사실로 기록에 자세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곧 <훈민정음> 해례본 기록에 집현전 학자들 일부만 창제 후에 도운 것임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있다.
 
(10) 드디어 전하께서 저희들로 하여금 상세한 풀이를 더하여 모든 사람을 깨우치도록 명령하시었다. 이에, 신이 집현전 응교 최항과 부교리 박팽년과 신숙주와 수찬 성삼문과 돈녕부 주부 강희안과 행 집현전 부수찬 이개와 이선로들로 더불어 삼가 여러 가지 풀이와 보기를 지어 그 대강을 서술하였다.(遂命詳加解釋,以喩諸人. 於是,臣與集賢殿應敎臣崔恒,副校理臣朴彭年,臣申叔舟,修撰臣成三問,敦寧府注簿臣姜希顔,行集賢殿副修撰臣李塏,臣李善老等,謹作諸解及例,以敍其梗槪.)-<훈민정음>(해례본) 정인지 서문
 
신숙주, 성삼문이 중국 음운학자 황찬의 자문을 구한 것도 창제 이후의 사건이다.
 
(11)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와 성균관 주부 성삼문과 행 사용 손수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遣集賢殿副修撰申叔舟、成均注簿成三問、行司勇孫壽山于遼東, 質問韻書.)-세종실록, 세종 27년(1445) 1월 7일자 
 
아홉 번째 근거는 세종은 뛰어난 언어학자요 과학자요 예술가였다. 이는 한글이 갖고 있는 다음과 같은 복합적 의미에서 드러난다. 
 
   
▲ [그림 ] 훈민정음의 복합적 문자 범주(김슬옹, 2011,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 지식산업사, 133쪽)
 
   
▲ [그림 ] 훈민정음 문자 범주(김슬옹, 2011,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 지식산업사, 443쪽)
 
한글은 다양한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의 연계가 아닌 다양한 학문 분야에 정통한 학자의 통섭 접근이 있어야 창제가 가능한 문자였고 실제 한글은 그런 통섭, 융합성을 지녔음을 위 그림이 잘 보여준다.
 
열 번째 근거는 한글 자체에 담겨 있는 놀라운 사상과 그러한 사상의 소유자는 바로 세종이었다는 점이다. 한글 창제는 음양 오행이라는 동양의 전통 철학과 이를 뛰어 넘는 삼조화 사상, 천문과 음악 연구를 바탕으로 구축한 언어 이론, 근대 언어학과 탈근대 언어학의 장점을 싸 안으면서도 이를 뛰어넘는 인류 사상사, 발명사의 혁명, 이를 뛰어넘는 빅뱅과 같은 사건이었다. 바로 이런 세종의 사유는 세종의 기획과 전략에 의해 나온 <훈민정음>(1446), <동국정운>(1448), <용비어천가>(1447), <아악보>(1430), <제가역상집>(1444) 등에 나타나 있다.
 
김슬옹 기자 tomul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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