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거품처럼 사라진 정조 개혁의 업적

2013.06.10 06:51:33

[나만 모르는 한글이야기 4] 정조의 한글 사용과 개혁의 한계

[그린경제=김슬옹 문화전문기자]  조선왕조 22대 정조 임금은 한글과 관련된 흥미로운 세 통의 편지를 남겼다. [사진 1]은 원손(영조의 맏손자) 시절에 외숙모인 민 씨(홍봉한의 며누리)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현대말로 옮겨 보면 이렇다. 

   
   ▲ 정조의 원손 시절 한글 편지

"숙모님께
가을바람에 몸과 마음이 평안하신지 안부를 여쭙습니다. 뵈온 지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봉서를 받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고 하오니 기쁘옵니다. _원손"

영조 35년(1759년)인 여덟 살 무렵 썼다고 하는 이 편지는 받는이와 보내는이만 한자이고 나머지는 정겨운 한글 글씨로 되어 있다. 정조는 바로 여덟 살 때인 이 해(1759년) 2월 12일에 세손으로 책봉된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세손으로 임명되기 직전인 연초에 쓴 편지로 보인다.  

어린 나인데다가 여성과의 편지 왕래는 한글로 하는 것이 일반 관습이고 보면 한글 편지가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어린 나이에도 편지틀에 맞추어 외숙모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외할아버지의 건강에도 마음 쓰는, 효성스러운 손자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 2]는 세손 시절의 편지글이다.

   
    ▲ 정조의 세손 시절 한글 편지

"날씨 몹시 추운데, 기운이 평안하오신지 문안 알기를 바라옵니다.
오랫동안 봉서(封書)도 못 하여 섭섭하게 지냈는데, 돌아재가 들어오니 든든합니다.
[내(세손)가 돌아재에게] “(사가 사람이 궁에) 들어오기 쉽지 않으니 내일 나가라.” 하오니,
[돌아재가 대답하기를] “오늘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면서 단호하게 못 있겠다고 합니다.
할아버님께 인마(人馬)를 내일 보내오시길 바라오며, (인마는) 수대로 (다) 못 들어오니 훗날 부디 (형편이) 낫거든 들여보내시옵소서. _세손"

이 편지는 정확히 누구에게 보냈는지 편지만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날씨가 몹시 차가운데 기운 평안하게 지내신다는 문안을 알고자 바라며”로 시작하는 글이 세손의 몸으로 편지 격식을 차려 웃어른께 안부 여쭙는 모습이 제법 의젓해 보인다. 궁 밖 친척과의 왕래가 눈앞에 펼쳐지듯 매우 정감 있게 묘사되어 편지로서의 섬세함을 드러내고 있다.

[사진 3]은 ‘뒤죽박죽’이란 한글 표현이 들어간 정조의 한문 편지다. 

 

   

      ▲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한문 편지. 한문편지임에도 뒷부분에 적당한
          한문을 찾지 못한듯 "뒤죽박죽"은 하늘로 썼다.

이 편지는 1796년부터 1800년까지 4년 동안 노론의 얼굴이었던 심환지에게 남몰래 보낸 편지 중의 하나이다. 그 부분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요사이 벽패(僻牌)가 떨어져나간다는 소문이 자못 성행한다고 한다. 내허외실(內虛外實)에 비한다면 그 이해와 득실이 과연 어떠한가? 이렇게 한 뒤라야 우리 당(黨)의 광사(狂士)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벽패 무리들이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에는 종종 이처럼 근거 없는 소문이 있다 해도 무방하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_정조(번역 도움 안대회)"  

한문 실력이 뛰어 난 정조였지만, ‘마구 뒤섞여 엉망이 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뒤죽박죽’ 말고는 이를 대신할 한자어를 찾을 길 없어 우리 고유어를 그대로 한글로 쓴 듯하다. 한문 편지에 고유어 하나를 한글로 적었다는 사실은 격에 맞지 않고 불균형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한국인의 생각과 느낌을 한문에 담는 데에는 엄연한 한계가 도사리고 있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의 한글 관련 편지는 이 세 통이 전부다. 수백 통의 편지를 남겼지만 이것 외는 모두 한문 편지다. 정조 23(1799)년에 규장각에서 펴낸 정조의 시문, 윤음, 교지 등을 모아 엮은 100책이나 되는 방대한 <홍재전서>도 한문으로 되어 있다. 

정조는 다른 임금들보다는 더 많이 한글 윤음을 발표하고 오륜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하여 펴내기는 했지만 다른 임금과는 다른 한글 사랑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정조의 원손, 세손 시절의 한글 편지가 한글을 사랑했다든가 한글에 대한 무슨 특별한 의식이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정통 한문 문체 개혁에 신경을 썼지 한글 사용 확대를 통해 쉬운 문자를 통한 지식의 보급과 소통의 세종 정신을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다. 세종을 흠모했다던 정조의 결정적인 한계인 셈이다.  

물론 누구나가 인정하듯 정조의 개혁 정신과 그가 남긴 업적은 위대하다. 그럼에도 그의 그런 빛나는 업적은 그가 죽자 물거품 사라지듯 대부분이 사라지거나 퇴보했다. 그 원인을 흔히 정순왕후로 상징되는 수구 보수 세력의 재집권에 따른 그들의 전횡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2차적 원인이다. 1차적 원인은 정조가 한글에 담긴 세종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서 아닐까? 순수 정통 한문을 강조하는 문체 반정이 아니라 세종의 한글 정신을 조금이라도 더 넓게 펴는 문체 개혁을 했더라면 정조 사후에 아무리 퇴행적인 권력자가 잘못된 정책을 폈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위대한 업적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역사의 후퇴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어떤 개혁도 지식과 책을 통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개혁의 가치를 널리 퍼뜨리거나 지속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조가 원손, 세손 시절에 한글 편지를 통해 소통하고자 했던 그 섬세한 마음이 애틋하고 소중해 한글을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임금으로서의 정조가 안타까운 것이다.  

한자나 한문으로 옮길 수 없던 ‘뒤죽박죽’, 굳이 한문으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뒤죽박죽’으로 표현하고 싶은, 표현해야 하는 민초들의 소통 욕망과 그런 표현의 가치를 왜 정조 같은 실용 군주가 소홀히 했을까 두고두고 아쉬운 역사이다.  


 
 
** 김슬옹:
한글학회 연구위원, 세종대 겸임교수, 한글문화연대 운영위원
저서  :   열린 눈으로 생각의 무지개를 펼쳐라, 글누림, 2013
            한글 이름 사전, 한겨레출판사, 2013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 지식산업사, 2011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아이세움, 2007
 

김슬옹 기자 tomul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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