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준 김가진 선생 집터 "백운동천(白雲洞天)"

2013.07.16 11:09:39

[종로문화통신 1]종로구 청운동 6 번지 일대 '장안으뜸' 백운장 자리

  • [그린경제 =조기태 기자]  김가진(金嘉鎭1846-1922) 은 김상용의 12세 손으로 지금의 신교동 세종마을 푸르메 센터 근처에서 태어 났다. 호는 동농(東農)이다. 김가진의 집터 ‘백운장’ 영역은 지금의 청운동 1번지 부터 10번지까지 10.000여평에 이르는 매우 넓은 터였다. 자하문터널 남쪽 입구 바로 위에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와 청운동 벽산빌리지 등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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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장각참서관(奎章閣參書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880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881년 장례원주부(掌禮院主簿)가 되었다. 그 뒤 인천항 통상사무아문주사(通商事務衙門主事)·부수찬(副修撰)·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과 장령(掌令)·사복시정(司僕寺正)·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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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농 김가진 선생의 글씨이며 이 바위 밑 자락에 선생의 집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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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흔한살이 되던 1886년 정시문과에 급제한후 개화 관료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천진 주재 종사관과 일본국 주재 판리대신 등으로 외교 일선에서 외국문물을 보고 배웠으며 1894년 갑오개혁때는 군국기무처의 의원으로서 각종 개혁안을 기초했다. 독립문의 한글과 한자 현판을 썼다. 공조판서,농상공부 대신, 중추원의장 등을 거쳐 59세가 되던 1904년(광무8년) 종1품 숭정대부의 반열에 올라 비원장,법부대신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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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년 그가 비원장으로서 창덕궁 후원 중수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고종이 남은 자재로 김가진의 집을 짓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장안으뜸” 이라는 “백운장”이었다. 백운장 옆에 ‘몽룡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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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고종이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하는 1907년 이듬해 1908년 9월, 마지막 관직인 규장각 제학을 사임했다. 1908년 대한협회의 창립에 관여하고 제2대 회장이 되어 자주국가로 다시 일어서는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1910년 일본과 강제 병합이 되고 대한협회도 해산 되자 그는 백운장에 칩거했다. 일제는 조선귀족령에 따라 구한말 중신들에게 작위를 수여했는데 김가진에게도 가강 낮은 등급인 남작을 수여했으나 연금 수령은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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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18년경 백운장의 집사가 김가진 몰래 백운장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저당잡혀 소유권이 넘어갔다. 소송을 제기했지만 일단 그 집에서 나와야 했다. 그 때 간 곳이 사직동 162번지 지금의 스페이스본 자리 50여평 한옥이었는데 여기서 한두해 살았다. 이곳 길 이름이 한때 동농(東農,김가진의 호)길이었다. 1919년에는 더 작은 체부동 86번지(지금의 토속촌 삼계탕 자리)로 옮겼다. 이 무렵 3.1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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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4세의 노구에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대동단의 총재직을 수락 한뒤 그해 10월 아들 김의한 (1900~1964)만 데리고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대동단 총재로서 국내의 조직과 연계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며 임정의 고문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의 단결을 호소하며 교민들을 다독였다.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 여사는 각각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과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조기태 : 세종마을가꾸기회 대표

조기태 기자 sejongmae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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