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윤옥문화전문기자] 가실 때, 정로환 한 병을 가방에 넣어드렸다 /멀리서 손주딸 살림을 들여다보러 온 처할머니가 /선 채로 똥을 지렸다 /다리를 타고 내린 덩어리 하나가 /바닥에 멈추어 섰다/ 아내는 얼른 달려가 휴지로 그걸 훔쳐내었다/ 바지를 벗기고 노구를 씻겼다 /(중략) /가실 때, 정로환 다섯 알을 내가 먼저 꺼내 먹고 /가방에 넣어드렸다.
위는 윤성학의 "정로환( <창작과비평,2004. 여름호)"이란 글이다. 어떤 사람은 ‘정로환’을 시로 쓰고, 어떤 사람은 야밤에 라면 먹고 탈 난 속을 ‘정로환’ 을 먹고 다스렸다 하고…. 그야말로 인터넷에는 ‘정로환’ 예찬이 줄줄이 사탕이다.
▲ 정복할 정자를 써서 지금도 정로환을 만들고 있는 일본의 일부 회사
일본말로는 ‘세이로간(正露丸)’인 정로환)은 복통, 설사, 소화불량, 식중독, 물갈이 배탈 따위에 잘 듣는다고 하는 약이다. 한국에서 파는 ‘정로환’은 예전엔 환약이라 해서 까만 콩장같이 생긴 것밖에 없었는데 요즈음은 분홍빛 당의정을 입힌 것이 등장해서 먹기가 수월하다. 옛것을 고집하는 사람들 탓인지 지금도 예전 모양의 환약과 당의정 두 가지가 판매되고 있는데 옛날식 환약은 한약 특유의 냄새가 나서 좀 꺼려지지만 오히려 그 냄새를 즐기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대관절 이 ‘정로환’이 어쨌다는 거냐고 묻는 사람들을 위해 결론부터 이야기하련다. 정로환은 일본제국주의가 한창 팽창하던 1903년 만주지역으로 파병된 자국군의 설사병을 막으려고 만든 일종의 지사제(설사 멈추는 약)이다.
러일전쟁 시에 만주에 파병한 건강한 젊은 병사들이 이유도 없이 하나 둘 죽어나가자 일본군부는 원인 조사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때 육군 군의학교 교관이었던 도츠카(戸塚機知)는 1903년 크레오소트제가 티푸스균에 대해 탁월한 억제 효과가 있음을 발견한다(일설에는 1902년 다이코약품회사가 먼저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약은 당시 러일전쟁에 투입한 병사들에게 매일 먹도록 하였는데 당시의 약 이름은 ‘크레오소트환’이었으며 ‘정로환, 征露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러시아를 정복했다는 ‘정(征)’, 러시아의 ‘로(露)’를 붙여 만든 이름으로 당시에 크게 유행한 말이다. 러시아를 무찔렀으니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전쟁 승리를 도운 약 정로환은 그 뒤 배탈, 물갈이, 설사병 따위에 잘 듣는 보통명사가 되어 버렸다.
밥도 행군하면서 먹어야 하는 전시(戰時)에 병사들이 설사로 죽어가니 일본 군부로서도 몸이 달았을 것이다. ‘배탈 설사를 멈추게 할 좋은 약을 만들라.’라고 명치천황이 직접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군납품 약에서 출발한 정로환은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 군납품이 중지되었으나 2007년 일본자위대의 국제연합 네팔지원단 파병 시에 상비품으로 챙겨 보내질 정도로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인기가 높다.
그러나 러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일본은 ‘국제적 신의상’이라는 이유를 들어 정복할 정(征)자를 바를 정(正)자로 고쳐 쓰도록 전국의 제약회사에 명령하게 되는데 나라현(奈良県)에 있는 ‘일본의약품회사’만은 지금도 러시아를 정복하자는 정로환(征露丸)을 고집하고 있을 만큼 이 약에 대한 애착이 크다.
러시아를 정복하든(征), 러시아를 바르게 하든(正) 정작 당사자인 ‘러시아’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약 이름이다. 러시아가 어때서 러시아를 바로 한단 말인가? 이런 저간의 사연이 있건만 ‘정로환’은 한국에서도 여전히 일본을 흉내내어 바를 정(正)자 정로환(正露丸)으로 팔리고 있다. 한국이 러시아를 바르게 해야 할 이유도 없으면서 말이다.
정로환 자체는 좋은 약이다. 지금은 우리의 기술로 만들어 내는 약이면서도 여전히 정로환(正露丸)으로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는 일본을 겨냥해 우리도 약이름을 정일환<征日丸>으로 붙여 팔면 어떨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