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논산의 명재(윤증)고택을 찾아가는 날, 비는 오락가락하고 더위도 제법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대문이 없는 집안에 들어가면서 만난 아름다운 정원과 붉게 핀 배롱나무는 불쾌지수를 깨끗이 씻고도 남음이 있었다. 누마루 같이 탁 트인 사랑채에 오르면서 고택이 주는 편안함 그 이상의 운치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사랑채 앞 정원 |
의전과 의창제도로 가난한 이들을 구제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 종가는 나눔을 실천한 집으로 유명합니다. 어떤 나눔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사랑채에서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이는 명재의 12대 후손인 윤완식(尹完植·1955~) 선생. 그는 서울에서 사업하다 15년 전 모든 걸 접고 귀향했다고 한다. 원래 종손은 형님이었지만 몇 년 전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현재 봉사손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 종가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명재의 12대 후손인 윤완식(尹完植·1955~) 선생 |
“명재 할아버님의 큰아버지 윤순거(尹舜擧) 할아버님 이후 우리 집안은 이웃과 함께 살기 위해서 의전(義田)과 의창(義倉) 제도를 운영하였습니다.”
윤순거 이후 윤씨 노종파는 다시 5파로 나뉘는데 윤순거 선생은 이 다섯 집에 각각 논 7마지기씩 모두 35마지기를 내놓았다. 그러면 다섯 집에서는 매년 농사를 지어 소출의 일정량을 문중에 기금으로 적립하였는데 이 기금은 의전(義田)으로 의로운 일에 썼다고 한다.
윤순거 선생은 또한 조상의 무덤이 있는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보였다. “윤씨들은 마을 사람들이 어려워질 수 있으므로 들어가 살지 말 것, 집터와 채마밭의 소작료는 면제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생활을 지탱할 만큼의 논밭을 빌려준다. 마을 사람들의 경조사에는 종중에서 상당량을 보조하고 빌려준다. 흉년이나 우환이 있으면 상당한 돈을 보조 또는 빌려준다.’라는 원칙을 지키라고 후손에게 가르쳤다.
이 의전제도는 명재 이후 한때 소홀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1799년(정조 23)과 1802년(순조 2)에 큰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초상이 나도 장례를 치르지 못 하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 윤광저(尹光著)·윤광형(尹光炯) 등이 발의해 의전보다 좀 더 큰 규모인 의창(義倉)을 설립했다. 이에 윤씨 집안이 거족적으로 참여하고 고향인 노성 현내의 크고 작은 18개 종계(宗契)에서도 돈을 모았다.
이 적립한 기금에서 나오는 쌀이 매년 200석이었다고 한다. 매년 200석의 쌀로 수해나 가뭄 또는 빈민 구휼 사업에 나섰던 것이다. 의창은 근래까지 유지되다가 6·25 이후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서 해체되었다고 한다. 곡물을 쌓아 놓던 의창의 창고 건물은 없어졌지만 그 자리에는 현재 의창비(義倉碑)가 서 있어 그 역사를 말해 준다.
부자가 양잠을 해서는 안 될 것
▲ 사랑채 전경, 편액에는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이라 쓰여 있다. |
“또 명재고택에서는 누에를 치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건 부자가 양잠까지 손을 대면 가난한 사람이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진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윤 선생의 말은 윤광소가 펴낸 ≪명재선생언행록(明齋先生言行錄)≫에 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양잠하는 것을 금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利)를 따라 행하면 원망이 많다. 우리 가문이 선대이래 남에게 원망을 듣지 않은 것은 추호도 남의 일을 방해하지 않았던 데 있다. 이는 자손들이 마땅히 삼가 지켜야 할 일이다. 요즘 민원(民怨)의 큰일은 양잠하는 일이다.
집에서 뽕나무를 심지 않고 양잠을 한다면 노비를 시켜 뽕나무 있는 집으로 나가 훔치고 약탈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자기만 이롭고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일이라 아니하겠는가. 이번에 종중과 더불어 약속할 것은 지금부터 뽕나무를 심지 않은 집은 양잠을 하지 않아야 훔치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름지기 동네 사람들의 원망과 단절하는 일이 되게 하라. 양잠을 안 하면 도적질의 폐단도 끊을 수 있을 것이고, 향민(鄕民)들의 원망도 그칠 것이다. 각자 조심하고 생각해서 가법을 잃지 않게 하라’ 하였다.”(‘明齋言行錄’, 63쪽)
요즘 대기업들이 골목상권까지 싹쓸이 하는 것은 명재 선생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 더불어 사는 정신이 더욱 빛을 발한 건 윤완식 선생의 증조할아버지인 윤하중(尹昰重) 대에서 빛을 발한다. 윤하중 선생은 1939년 흉년이 들어 주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이를 돕기 위해 일부러 공사를 벌였다. 신작로에 석축을 쌓는 공사를 벌였고, 이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에게 노임으로 쌀을 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냥 쌀을 주기보다 노동을 한 대가로 주는 방법이 서로 부담이 없다고 본 것이지요. 원래 나라에서 해야 할 취로사업을 개인이 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을에 추수를 한 뒤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며칠 동안 나락을 쌓아 두었습니다. 밤에 동네 사람들이 가져가도 일부러 모른 체 했지요. 밤에 가져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었으니까요. 혹시 머슴들이 누가 가져갔는지 말하면 모른 체 했다고 합니다.”
고택은 6ㆍ25전쟁 때 인민군들이 막사로 쓰는 바람에 미군기의 공습을 받을 위기가 있었지만 이 마을 출신 전투기 조종사의 적극적인 중재로 명재고택은 폭격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명재 집안이 대대로 덕을 쌓아온 음덕이 보답으로 돌아온 셈이다.
명재선생, 꽁보리밥에 볶은 소금과 고춧가루를 먹다
후손, 겨울엔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는 게 예사
▲ 낮은 굴뚝과 장독 |
명재 선생이 평소 살던 집은 현재의 명재고택이 아니었다.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유봉영당(酉峰影堂)의 바로 옆 공터가 그가 살던 집터였다는 것이다. 선생은 초가삼간을 짓고 소박하게 살았는데 하루는 제자가 찾아가 보니 그 초가삼간마저 무너져 긴 나무로 떠받쳐 지탱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집안의 선반에는 책이 가득 차 있고, 주변에는 항상 선생의 정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넘쳐났다고 전해진다.
명재 선생은 보리밥에 볶은 소금과 고춧가루만 먹는 때가 많았다. 손님이 와도 꽁보리밥과 볶은 소금만 함께 먹어야만 했다. 그런가 하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사치스러운 일이라며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 전해지는 초상화는 화원이 문틈으로 훔쳐보고 그린 것이어서 옆 얼굴만 보인다고 했다. 정면이 보이는 것은 옆 얼굴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2차 작업을 한 것이라고 한다.
“저는 고구마를 잘 안 먹습니다. 겨울만 되면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곤 해 이골이 났기 때문이지요. 아버님께서는 식량을 아껴서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실천하신 것입니다. 특히 아버님 생신이 한겨울인 음력 1월 9일인데 생신상을 차리는 대신 그 쌀을 이웃에게 베풀 만큼 철저히 자신이 절약하는 모범을 보이셨기에 자손들도 그런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 보통 양반집에 있는 것보다 작은 99×68cm 크기의 제삿상 |
윤완식 선생은 아버지의 베품정신을 이렇게 회상했다. 부자가 고구마로 끼니를 때웠다니 어디 요즘 부자가 그럴 수가 있을까? 명재고택에 있는 제사상은 보통 양반집에 있는 제사상보다 작은 99×68cm 크기다. 그러니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이나 과일 등이 소박할 수밖에 없다. 굳이 죽은 이에 대한 제사상을 화려하게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명재고택의 굴뚝은 낮게 만들었다. 구례 운조루와, 경주 최부잣집의 수평굴뚝과는 다른 형태지만 역시 가난한 이들이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에 맘 상할까봐 걱정한 것은 같은 이치이다.
명재, 지역차별 하는 조정의 벼슬은 안 할 것
20번의 벼슬 제의 그리고 우의정 자리도 거절
명재 선생은 평생 조정으로부터 20번이 넘는 벼슬 제의를 받았다. 대개의 경우 2~3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나가는 것이 보통이나 선생은 달랐다. 심지어 말년에는 숙종임금이 직접 정1품 우의정을 준다고 해도 받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의 전횡을 끊임없이 비판했던 명재 선생은 영남 사람들이 소외된 조정에는 들어갈 수 없음을 고수했다. 분명한 도덕적 카리스마는 송시열도, 임금도 어쩌지 못했음이다.
▲ 해시계를 보는 자리라는 "일영표준" |
▲ 사랑채 앞에 잇는 금강산을 닮은 석가산 |
사랑채에서 마당 쪽을 내려다보면 40~50cm 정도 크기의 뾰족뾰족한 돌들을 세워 놓았다. 아니 그냥 돌들이 아니고 금강산을 본으로 만든 석가산이란다. 여름날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마루에 앉아 멀리 동남쪽을 바라보면 계룡산의 봉우리들이 다가오고, 시선을 아래로 하여 정원 쪽을 바라다보면 금강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강산 구름 위에 내가 있으니 나는 신선이 된 것인가? 사랑채 옆에 걸린 편액 글씨가 “도원인가’(桃源人家)” 곧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이라 쓰인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명재고택은 예전에 윤증고택으로 불렀다. 하지만, 이제는 “명재고택”이다. 큰길의 안내판에도 “명재고택”으로 되어 있다. 명재는 윤증 선생의 호이다. 하지만, 아직 길찾개(네비게이션)는 “윤증고택”으로 찾아야 나오니 답사를 오는 사람들은 고쳐질 때까지 당분간 헷갈릴 수밖에 없다.
▲ 사랑애에 붙은 “도원인가’(桃源人家)” 곧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이라는 편액 |
서울로 돌아와야 하지만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도원인가’(桃源人家)”에서 신선이 되었으니 신선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게다. 아니 명재 선생의 도덕적 카리스마와 나눔 철학을 내 가슴 깊이 새기고 싶은 까닭일레라.
▲ 아름다운 장독대 뒤의 안채와 사당